앵 무
이기인
앵무는 몇 개의 단어로 하루치의 버릇을 벗는다
너는 누구야 아무것도 아니야 사라지는 농담이야
말을 버리고 소리를 배우는 조롱 속에서 머리를 가슴에
수수께끼를 모이통에 넣어주듯이
오랫동안 가르치지 않는 말을 쏟아 놓는다
너는 누구야 아무것도 아니야 사라지는 농담이야
농담이 이어붙이는 앵무가 이상하다
안녕하세요 진짜로 안녕하세요 사라지는 느낌도 안녕하세요
안녕은 두 마리로 갈라지는 농담이야
이기인은 시적 실험을 치열하게 하는 시인이다. 그는 언어의 알쏭달쏭한 의미의 추구와 알쏭달쏭한 표현으로 언어규범의 해체를 시도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시적 감각과 시적 의미의 의도적인 교란을 통해 착란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언어의 규범을 부수려는 시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앵무」는 그의 착란이 난센스에 이르는 도정의 시편으로 읽힌다. 이 때의 착란은 사실적이어서 그의 감각과 의미가 뿌리 깊은 착란임을 보여준다. 앵무는 시적 화자와 동격이니 시인이 곧 앵무라고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앵무의 말이거나 시적 화자의 말이거나 시를 이해하고 느끼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다만 시문이 거기에 있으니까, 그 시문이 수많은 이미지들을 거느리니까 「앵무」는 살아 있는 문장인 것이다.
이 시의 비의는 ‘너는 누구야 아무것도 아니야 사라지는 농담이야’에 있다. 발화자가 앵무인지 시적 화자인지 모호한 이 문장에 이 시가 말하려는 시안詩眼이 있는 것이다.
앵무가 벗는 하루는 몇 개의 단어다. 인간은 몇 개의 단어로 하루를 벗을까. 앵무와 크게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루를 벗는 언어는 사라지는 언어고 사라지는 의미다, 언어가 죽으면 사람이 죽는다. 매일 죽는 언어가 매일 죽는 인간들이다. 그러므로 ‘너는 누구야’라고 묻는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아니야 사라지는 농담이야’라고 대답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매일 죽는 말은 오랫동안 가르치지 않은 말들이다.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쏟아놓는 말은 이미 말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에 다름 아니다. 욕망하는 말들이니 가르치지 않아도 오는 것이다.
그때의 말들은 말이 아니라 소리다. 의미를 버린 것으로서의 소리는 ‘안녕하세요’라고 들린다고‘안녕하세요’가 아니다. 다만 소리일 뿐이다. 그 소리가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앵무 사이, 인간과 사물 사이에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이의 말은 소리일 뿐 의미가 없다.
그 관계가 소원해서‘사라지는 농담’같은 것이라면 인간과 인간 사이 혹은 인간과 사물 사이는 메마르고 무의미하다. 앵무가 ‘안년하세요’라고 말해도 그건 오르골이 내는 듣기 좋은 소리 같은 것이다. 그리고‘안녕’은 ‘두 마리로 갈라지는 농담’이라고 노래하지만 ‘안녕’은 별리의 장에 찍히는 마지막 말이어서 결코 농담일 수 없는 것이다. 김윤배/시인<용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