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통제 최서진 소리가 들리지 않는 다큐멘터리를 본다 귀를 막아도 들리는 소리가 있어 빗방울 하나 주워 들고 파도 소리를 듣는다 날개를 갖지 못한 새는 모두 꽃이 될까 수국이 지면 장마가 오는 이유 모란이 가고도 다시 모란이 오는 이유 어둠을 모아 흰나비로 날려 보내야 하는 이유 꽃자리마다 숨겨 둔 슬픔이 있어 열꽃이라는 말에는 뜨거움과 서늘함이 함께해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지워지고 싶은 날 스스로 제온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어 바다거북이처럼 폭염이 유난했던 하루가 서쪽 하늘에 펼쳐진다 꽃을 실은 바람이 불어 구름이 잠깐 흔들리고 오늘부터 빨강 구름을 믿으려고 해 해열진통제를 먹고 이마를 가만히 짚어 본다 해열 진통제를 보면 이마를 짚어 주던 한 사람이 떠오르고 오늘의 장보기 리스트, 따뜻한 아이스크림 『지구의 모든 저녁이 모여 있는 곳』 (파란 , 2026년)중에서. 2004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아몬드 나무는 아몬드가 되고]외 3권. 김광협문학상, 발견문학상 수상.
공복 이돈형 배워도 배워지지 않는 게 있다 사람의 일렁임이 광활해질 때 그 광활함에 내가 죽을 수 있겠다 싶어 잘못 배운 놈처럼 일렁임을 죽이려 했으니 사람아 맥박을 타고 놀던 사람아 속속續續에 물들어 슬금슬금 가물거림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아 가물가물 보다 먼저 산산散散해지는 사람아 소沼를 떠난 물 같은 사람아 한 모금쯤 되는 사람아 여지껏 배웠다고 배웠는데 익히지 못한 내 안의 공복이 울어 제끼니 손쓸 틈 없이 울어 제끼니 사람아 오늘은 자빠진 슬픔을 뒤집어놓고 몸 어딘가를 싸돌아다니는 사람을 끄집어내려 하니 애초에 내가 없었으면 좋았으려니 사람아 여린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은 저 광활한 우주가 있어 혼들리는 게 아니라 바라보는 내가 있어 흔들리는 것이니 흔들리는 사람아 시집 『나의 태몽은 나무랄 데가 없으니까요』 (지혜, 2025) 중에서 이돈형 시인 2012『애지』로 등단 2018년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김만중문학상, 애지작품상, 선경문학상 수상 시집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잘디잘아서』,『나의 태몽은 나무랄 데가 없으니까요』등
나방 손석호 건강한 102세 어미가 야윈 팔십 대 딸의 손에 이끌려 요양원에 맡겨졌다 어둠을 몰고 와 창가에 앉는 불나방 아파도 약을 주지 말라는 딸의 말을 엿듣고 파닥인다 낮 동안 조용하던 어미 난다 경북 영주 출생 1994년 공단문학상, 2016년 [주변인과 문학] 등단. 시집 [나는 불타고 있다] [스파이더맨], 2025년 제1회 무등문학상 작품상 수상.
기린이 살고 있다 이 석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놀이터에는 기린이 살고 있다 네 다리는 쩍 벌리고 허리는 반듯하게 머리는 하늘을 바라본다 기린은 등에 줄을 매달고 누구에게나 자리를 내어준다 줄에 매단 의자가 출렁거릴 때 기린은 세렝게티를 달린다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는 무리의 중심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않은 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수컷 기린이 있다. 평원을 달리는 기린은 꿈을 꾸지 않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 놀이터에는 꿈을 꾸는 아이와 꿈을 지켜주는 아빠가 그네를 타며 평원을 달린다. 우리 아파트 중앙에는 꿈을 꾸고 있는 기린이 살고 있다 본명: 이동석 용인 대학교 대학원 졸업 경희 사이버 대학 재학중 용인문학회 회원 우리문학 등단
나는 간다 이기형 (1917 ~ 2013) 역마다 백두산표를 안 팔아 나만 미쳤다고 쑥떡인다 과연 누가 미쳤나 흑발이 백발이 되도록 귀향표를 살려는 놈이 미쳤나 기어이 못 팔게 하는 놈이 미쳤나 그럼, 나는 간다 미풍 같은 요통엔 뻔질나게 병원을 드나들어도 조국의 허리통엔 반백년 동안 줄곧 칼질만 해대는 저놈 메다꼰지고 걸어서라도 날아서라도 내 고향이 옛날처럼 나를 알아보게끔 하얀 머리는 까맣게 물들이고 얼굴 주름은 펴고 어리고 찢어지는 가슴 쓰다듬으며 나는 간다 걸어서라도 날아서라도 이기형 1917년 함남 함주 출생. 언론인 · 시인이며 재야 민주화 운동 인사. 『이기형 대표시 선집』에서
봄 윤동주 봄이 혈관(血管)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어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페어 스케이팅 도종환 정점을 향해 솟구쳐 오르다 넘어졌다 관중들은 넘어지면 끝이라 여기겠지만 넘어지는 일은 자주 있지 세상도 곳곳이 빙판이니까 다시 균형을 잡는 일이 중요하지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다시 허공에 전신을 던지는 거지 넘어지는 일은 언제든 있는 거니까 우리가 선곡한 음악이 아직 흐르고 있으니까 다시 빙판을 밀고 나가는 거지 세상도 순간순간 아슬아슬하니까 도종환 청주에서 태어났다. 시집『고두미 마을에서』『접시꽃 당신』『지금 비록 너의 곁을 떠나지만』『당신은 누구십니까』 『흔들리며 피는 꽃』『부드러운 직선』『슬픔의 뿌리』『해인으로 가는 길』『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사월 바다』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등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백석문학상, 공초문학상, 신석정문학상, 가톨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유목의 강 김종경 강물은 그냥 울면서만 흘러가는 게 아니다 날마다 낯빛이 바뀌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물결 속엔 자갈보다 찰진 근육이 있고 바위보다 단단한 뼈가 숨어서 강물은 이따금 남몰래 벌떡 일어나 걷다가 뛰다가 혹은 모래처럼 오랫동안 기어, 기어서라도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다 시집 『기우뚱, 날다』 중에서 김종경 약력: 경기 용인 출생, 2008년 계간 『불교문예』등단 시집 『기우뚱, 날다』, 『저물어 가는 지구를 굴리며』 동시집 『떼루의 채집활동』. 동화 『총소리가 들리는 언덕』(공저) 등이 있음.
할머니 최문석 추억 : 할머니랑 같이 사는 것 맛있는 것 사다 주는 것 어느 날 할머니가 떠나셨다. 할머니가 아파서 병원에(서) 입원하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할머니는 하얀색이다 머리도 하얀색 옷도 하얀색 이제는 기억도 하얀색이 되어 간다 그래도 할머니의 손은 여전히 기억난다 손 잡으면 따뜻했던 기억 최문석 지적장애(중증) 2024년 개인시집 출간(4인 4색 사업)
잔소리 조계진 반디스틱 선생님 똑바로 잡기, 강약, 박자 지키기, 북 정리 하기 약박으로 치기 교장 선생님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고 칭찬해 주세요 만화에서의 잔소리 고길동은 툭하면 잔소리를 한다. 사람들은 잔소리로 표현한다. 그냥 좋다고 하면 안 될까? 고길동은(이) 철수와 영희에게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사랑해서 잔소리를 한다. 고길동의 잔소리는 고철수와 고영희의 사랑이다. 조계진 지적장애(중증) 2023년 개인시집 출간(5인 5색 사업)
어떻게 만날까 정민기 무슨 말을 할까 옆집에 이사 오는 사람에게 휴지를 선물 할거야 잘 풀리라고 삐뚤삐뚤 정민기 뇌병변장애(중증) 2025년 개인시집 출간(3인 3색 사업)
내가 있는 우리 집은 장진수 정리 하고 밥도 먹고 설거지도 하고 살고 싶다 그러고 잠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도 먹고 정리도 한다 우리집은 그래서 편한 나의 둥지 우리 집에 누군가와 같이 살고 싶다 함께 이야기 하고 같이 밥 먹고 행복하고 싶다 장진수 지적장애(중증) 2024년 개인시집 출간(4인 4색 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