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사진 송시올 뱃고동 소리로 귀를 여는 오도리 마을회관 앞 볕 좋은 공터 한 자락 굽은 허리 꼿꼿이 편 채 저승길 훨훨 앞장세울 사진을 박는다 두런대는 수평선에 어깨 나란히 하고 사진 미리 찍어두면 천수만수 누린다는 말보다 공짜라는 말에 혹해 앉은 허리 굽은 우리 할매 갈매기 눈썹이 여간 우습다 모래톱 잠방대는 수평선에 어깨선 맞추고 셔터 소리 막걸리 사발마냥 찰칵 돌아 팔순 생애 울퉁한 손 마주 잡고 손으로 비벼 바른 연지 불콰하게 물결 곱다 썰물로 밀려나온 푸른 청춘이 생의 끝동에 붙이니 칼라가 되고 생의 말미에 붙이면 흑백이 되는 저승을 향해 활짝 웃고 있는 후렴구 뭉게구름 사이 고개 내미는 하현달 솜털 구름 찰칵 한방 끼워 넣었다 약력: 1963년 충청남도 논산 출생 2004년 포항 불빛축제 장원 수상 후 작품 활동 시작 2022년 '문학청춘' 시부문 신인상 등단
공단으로 오는 봄 박춘희 반월공단(半月工團) 반이 빈 공단(空團)으로 남았다 비어서 더 투명한 낮달처럼 정적만이 초지동, 원곡동을 지나 39번 국도로 빠져나간다. 동남아에서 온 노동자 몇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지나간다. 그들의 깊고 검은 눈동자가 구름으로 흩어진다. 염색 단지를 지나 시화호에 이르면 상한 물고기 떼 단단히 닫힌 수문을 물어뜯는다. 누구도 말을 걸지 않는 교각을 따라 해가 지고 바람이 먼바다를 데리고 오는 곳 아무도 바다만큼 올 수 없다. 저 혼자 짠물에 눈동자를 씻어 말리는 바다 갯발에 실려, 봄소식을 듣는 염생식물들 아무도 울지 않는다. 칠명초, 나문재, 퉁퉁마디 …… 터진 손등 발갛다. 『가물치 우는 밤』(파란) 중에서 약력: 경상북도 봉화 출생.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박사학위) 졸업. 2001년 [시와 시학] 시인 등단. 시집: <천 마리의 양들이 구름으로 몰려온다면> <[가물치 우는 밤>이 있다.
능소화 김주대 골목에 귀를 걸어 놓았다 귓바퀴에 당신 발소리 얹힐 때 그 무게로만 떨어지려고 시집: 『모든 흔들리는 눈망울 위에』 중에서 약력: 1991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도화동 사십계단』『그리움의 넓이』『사랑을 기억하는 방식』등을 냈다.
품 정현우 삼 년 전, 내 개는 죽었다. 지금쯤 엄마의 품에 내 작은 개가 안겨 있을 것이다. 죽음은 품을 닫아두었다. 나는 꿈을 열었다. 엄마의 품에 강아지를 맡기고 다시 돌아왔다. 시집 『검은 기적』 중에서 약력: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2015년 『조선일보』로 등단했다. 시집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소멸하는 밤』 『검은 기적』이 있고, , <동주문학상><한용운문학상>을 수상했다.
공중누각 이향란 내가 당신에게 잊혀 지지 않는 사람이 될 즈음 내가 당신에게 버릴 수 없는 사람이 될 즈음 나는 지상에서 없는 사람이 되었고 당신이 내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될 즈음 당신이 내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될 즈음 당신은 지상에서 흔적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지상에서 없어지고 당신이 흔적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번개가 되고 구름이 되었다 당신과 나의 말과 행동은 비록 천상에 가닿지 못해도 번쩍이거나 울컥거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상에서 우리를 끝까지 감싸주던 것은 나무나 못이 되어 보이지 않으나 보이는 집을 완성했다 가끔 큰 날개를 가진 새가 꿈결처럼 스쳐 지나가는 곳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태어나는 노래에 실려 다녔다 잊히거나 버려져도 아무 두려움이 없었다 지상도 천상도 아닌 뭐라 말할 수 없는 지점에서 우리는 투명한 영원을 짧게 살았다 <약력> 2002년 첫 시집 출간으로 작품 활동 시작. <뮤즈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등 네 권의 시집과 동시집 <지렁이에게 옷을 입혀줘>가 있음.
진통제 최서진 소리가 들리지 않는 다큐멘터리를 본다 귀를 막아도 들리는 소리가 있어 빗방울 하나 주워 들고 파도 소리를 듣는다 날개를 갖지 못한 새는 모두 꽃이 될까 수국이 지면 장마가 오는 이유 모란이 가고도 다시 모란이 오는 이유 어둠을 모아 흰나비로 날려 보내야 하는 이유 꽃자리마다 숨겨 둔 슬픔이 있어 열꽃이라는 말에는 뜨거움과 서늘함이 함께해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 지워지고 싶은 날 스스로 제온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어 바다거북이처럼 폭염이 유난했던 하루가 서쪽 하늘에 펼쳐진다 꽃을 실은 바람이 불어 구름이 잠깐 흔들리고 오늘부터 빨강 구름을 믿으려고 해 해열진통제를 먹고 이마를 가만히 짚어 본다 해열 진통제를 보면 이마를 짚어 주던 한 사람이 떠오르고 오늘의 장보기 리스트, 따뜻한 아이스크림 『지구의 모든 저녁이 모여 있는 곳』 (파란 , 2026년)중에서. 2004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아몬드 나무는 아몬드가 되고]외 3권. 김광협문학상, 발견문학상 수상.
공복 이돈형 배워도 배워지지 않는 게 있다 사람의 일렁임이 광활해질 때 그 광활함에 내가 죽을 수 있겠다 싶어 잘못 배운 놈처럼 일렁임을 죽이려 했으니 사람아 맥박을 타고 놀던 사람아 속속續續에 물들어 슬금슬금 가물거림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아 가물가물 보다 먼저 산산散散해지는 사람아 소沼를 떠난 물 같은 사람아 한 모금쯤 되는 사람아 여지껏 배웠다고 배웠는데 익히지 못한 내 안의 공복이 울어 제끼니 손쓸 틈 없이 울어 제끼니 사람아 오늘은 자빠진 슬픔을 뒤집어놓고 몸 어딘가를 싸돌아다니는 사람을 끄집어내려 하니 애초에 내가 없었으면 좋았으려니 사람아 여린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은 저 광활한 우주가 있어 혼들리는 게 아니라 바라보는 내가 있어 흔들리는 것이니 흔들리는 사람아 시집 『나의 태몽은 나무랄 데가 없으니까요』 (지혜, 2025) 중에서 이돈형 시인 2012『애지』로 등단 2018년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김만중문학상, 애지작품상, 선경문학상 수상 시집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잘디잘아서』,『나의 태몽은 나무랄 데가 없으니까요』등
나방 손석호 건강한 102세 어미가 야윈 팔십 대 딸의 손에 이끌려 요양원에 맡겨졌다 어둠을 몰고 와 창가에 앉는 불나방 아파도 약을 주지 말라는 딸의 말을 엿듣고 파닥인다 낮 동안 조용하던 어미 난다 경북 영주 출생 1994년 공단문학상, 2016년 [주변인과 문학] 등단. 시집 [나는 불타고 있다] [스파이더맨], 2025년 제1회 무등문학상 작품상 수상.
기린이 살고 있다 이 석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놀이터에는 기린이 살고 있다 네 다리는 쩍 벌리고 허리는 반듯하게 머리는 하늘을 바라본다 기린은 등에 줄을 매달고 누구에게나 자리를 내어준다 줄에 매단 의자가 출렁거릴 때 기린은 세렝게티를 달린다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는 무리의 중심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않은 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수컷 기린이 있다. 평원을 달리는 기린은 꿈을 꾸지 않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 놀이터에는 꿈을 꾸는 아이와 꿈을 지켜주는 아빠가 그네를 타며 평원을 달린다. 우리 아파트 중앙에는 꿈을 꾸고 있는 기린이 살고 있다 본명: 이동석 용인 대학교 대학원 졸업 경희 사이버 대학 재학중 용인문학회 회원 우리문학 등단
나는 간다 이기형 (1917 ~ 2013) 역마다 백두산표를 안 팔아 나만 미쳤다고 쑥떡인다 과연 누가 미쳤나 흑발이 백발이 되도록 귀향표를 살려는 놈이 미쳤나 기어이 못 팔게 하는 놈이 미쳤나 그럼, 나는 간다 미풍 같은 요통엔 뻔질나게 병원을 드나들어도 조국의 허리통엔 반백년 동안 줄곧 칼질만 해대는 저놈 메다꼰지고 걸어서라도 날아서라도 내 고향이 옛날처럼 나를 알아보게끔 하얀 머리는 까맣게 물들이고 얼굴 주름은 펴고 어리고 찢어지는 가슴 쓰다듬으며 나는 간다 걸어서라도 날아서라도 이기형 1917년 함남 함주 출생. 언론인 · 시인이며 재야 민주화 운동 인사. 『이기형 대표시 선집』에서
봄 윤동주 봄이 혈관(血管)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어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페어 스케이팅 도종환 정점을 향해 솟구쳐 오르다 넘어졌다 관중들은 넘어지면 끝이라 여기겠지만 넘어지는 일은 자주 있지 세상도 곳곳이 빙판이니까 다시 균형을 잡는 일이 중요하지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다시 허공에 전신을 던지는 거지 넘어지는 일은 언제든 있는 거니까 우리가 선곡한 음악이 아직 흐르고 있으니까 다시 빙판을 밀고 나가는 거지 세상도 순간순간 아슬아슬하니까 도종환 청주에서 태어났다. 시집『고두미 마을에서』『접시꽃 당신』『지금 비록 너의 곁을 떠나지만』『당신은 누구십니까』 『흔들리며 피는 꽃』『부드러운 직선』『슬픔의 뿌리』『해인으로 가는 길』『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사월 바다』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등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백석문학상, 공초문학상, 신석정문학상, 가톨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