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아팠다. 감기인지 어지럽고 춥고 열이 났다. 추워서 이불을 정리해서 덮고 싶었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양말도 한짝 신고 한짝은 한참 후에야 신을 수 있었다. 울었다. 아파서 울었다. 아프니까 서럽더라. 나는 이 정도의 감기에도 아파서 우는데 요즘 한국에서의 아픔은 상상도 되지 않아서 울었다. 얼마나 아픈 사람이 많은지 혼자 아프고 있지는 않은지. 오랜만에 아파서 마치 처음 아픈 것 같았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아픔이 있는 걸까. 다행히 제프가 옆에 있어줬다. 자기가 제일 아팠을 때 이야기를 들려줬다. 열흘 밤낮을 아프면서도 비자 때문에 계속 이동했어야 했다고. 아무것도 못 먹고 화장실만 가서 미라처럼 말랐다고 했다. 웃기는데 웃기지 않았다. 그래도 남의 과거에서 위안은 얻었다. 때로는 나만 아픈 게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받아야만 맘이 편안해 질 때가 있다. 외롭다고 느껴서일까? 아무튼 아침에 일어났더니 열은 가셨고 여전히 어지럽지만, 지난밤보다는 나았다. 며칠 후엔 또 바다에 들어갈 수 있기를.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용인신문 | 나는 내향인 반, 외향인 반인 사람이다. 여행하다 보면 사람들과 24시간 있는 날이 생긴다. 그럴 때 의도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지 않으면 며칠 내내 혼자 있는 시간이 없기도 하다. 십중팔구는 지쳐버린다. 지친 후로는 제대로 대답하기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냥 멍때리는 시간, 책 읽고, 일기 쓰는 시간. 그림 그리는 시간. 그림을 그리면서부터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기가 쉬워졌다. 슬쩍 사라져서 그림 그리고 돌아오면 된다. 처음에는 사람들은 잘 노는데 나만 어느 순간이 되면 피곤해져서 힘든 게 마음에 안들기도 했다. 왜 나는 잘 어울리지 못하지? 쉽게 피로해지지? 이제는 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게 같이 있는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한 방법이라는 걸.
용인신문 | 샌디에이고의 퍼시픽 비치에서 몇명의 밴라이퍼를 만났다. 일부는 밴을 가지고 여행하는 여행자들이었고 단기로 밴에서 사는 사람, 집은 있고 별장처럼 쓰는 사람 등 다양한 용도였다. 흥미롭고 궁금해서 내부를 구경시켜달라고 하기도 했고 언제부터 이렇게 지냈는지 질문하기도 했다. 인상깊은 세 사람은 독일에서부터 소방차를 고쳐서 바다 건너온 청년들. 20살, 21살, 23살이라는 친구들은 40키로미터로 달리면서 하루하루 남쪽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최종 목적지는 아르헨티나라고. 멋지다. 움직이는 집을 가지고 여행이라니! 차 위에서 여유롭게 맥주 한잔 하며 선셋을 보는 모습이 나까지 덩달아 기분 좋게 만들었다. 몸 건강히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도달하길! Adios, y ve con dios!
용인신문 | 연인과 손을 잡고 걸을때, 자리가 정해져 있나요? 앤디와 미쉘은 미쉘이 언제나 왼쪽에서 걷는다고 했다. 짧은 거리를 갈 때도 손을 꼭 잡고 걸어간다. 하루에도 몇번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손을 보면서 참 보기가 좋았다. 크리스마스 퍼레이드를 보러 가는 길가에서 산타 모자를 나눔 받았다. 그 모자를 쓰고 걸어가는 둘. 여행자들이기도 하면서 다른 여행자들을 집으로 맞이해서 대접하는 사람들. 내 삶을 궁금해해주고 자신의 경험을 나눠줬다. 느리게 말해도 기다려주고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알려줬다. 이렇게 친절한 사람들이 내 여행 길에 자주 등장했으면 좋겠다.
용인신문 | 지구 나이 절반만 크기의 세월을 품고 있다는 그랜드캐년 앞에 섰다. 그랜드캐년은 널어서 동서남북 네 장소로 접근할 수 있다. 우리는 사우스림에 갔다. 11월 중순인데 북부 쪽은 이미 눈이 쌓였다고 한다. 처음 보고 든 감상은 와, 진짜 크다! 너무 광대해서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림으로 그려보려 해도 끝이 담기지 않아서 그릴 수가 없었다.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한 부분만 담을 수 있기 때문에. 빛이 들고 나는 것에 따라 모습이 완전히 바뀐다. 콜로라도 강이 100년에 3센치씩 깎아내려 만들어진 풍경이라고 한다. 바닥까지 가려면 7시간의 길을 걸어야 한다. 올라오는 건 9시간. 이번 방문에서는 눈에 담는 걸로 만족했지만 다음에 또 온다면 콜로라도 강까지 내려가보고 싶다.
용인신문 | 나는 그다지 자주 달리지 않는다. 그래도 여행 중에 아빠가 달리러 나가자고 하면 따라 나가는 편이다. 혼자 뛰기는 힘들어도 같이 뛰면 더 오래 달릴 수 있고 재미도 있으니까. 샌프란시스코에서 아빠가 제일 기대했던 것은 금문교 위를 달리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도 안해봤다) 뭐, 안될 거 있나! 가보자! 하고 아침에 나갔다. 금문교는 2789미터다. 우리는 한쪽 편에 주차를 하고 나서 뛰기 시작했다. 나는 뛸 때 자주 걷다 뛰다 하곤 하는데 이번에는 느리게라도 계속 뛰어보자고 생각했다. 가는 중간부터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불더니, 아니나 다를까 돌아오는 길엔 비가 오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도 아니고 세차게 내리는 비였다. 게다가 옆에서 지나가는 차가 튀기는 물까지…. 아플 정도로 따귀를 떄렸다. 입은 옷은 점점 무거워지고. 우리는 거의 젖은 생쥐꼴이 되어가며 뛰어 돌아왔다. 웃음이 마구 났다. 이게 무슨 일이야! 분명 출발 할 때는 좋은 날씨의 아침이었는데! 잊지 못할 기억을 만들어 주려고 하늘이 비를 내렸나 보다. 그래서 난 금문교를 비 맞으며 뛴 사람이 되었다!
용인신문 | 벌써 한해가 다 갔다. 연말을 맞이하면서 한해를 돌아본다. 먼저 사진첩과 일정표를 들여다보며 달별로 무엇을 하고 어디에 갔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확인해본다. 가까운건 잘 기억나고 연초에 있던 일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중에 기억하고 싶은 기억들과 사진들을 고른다. 그리고는 올해 나의 변화와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 무엇인지 돌아본다. 매번 빨리 갔다고 하지만 차분히 앉아 돌아보면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감사한 일과 주변에 있어준 사람들을 적는다. 가장 슬펐던 일과 가장 뿌듯한 순간도 적는다. 기억에 남는 칭찬과 기분 좋은 말들을 기록해 놓는건 나중에 힘들 때 큰 도움이 된다. 오래 잊을 수 없는 순간도 몇개 떠올려본다. 내가 올해 후회 속에서 배운 것은 내가 명확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왠지 민망하고 미안해서 하지 않은 말이 오해를 불렀다. 나의 최선으로 이야기를 했는데도 안된다면 우물쭈물하지 말고 확실하게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는 걸 배웠다.
용인신문 | 자전거 타기 좋은 계절이다. 자전거는 참 매력적인 이동수단이다. 걷는 것보다 빠르고, 차나 오토바이보다는 느리다. 하루에 100키로 정도는 이동할 수 있으니 여행수단으로써도 괜찮다. 초등학교 때는 놀자! 하고 친구랑 같이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를 누비고 다녔다. 옆 동네까지 모르는 길이 없을 정도로 다녔다. 새로운 길을 가보는 것을 좋아했다. 너무 익숙해서 마치 내 몸처럼 느껴졌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좋게 남아있다. 오래도록 자전거를 타지 않다가, 코로나 기간에 자전거를 다시 장만했다. 오랜만에 타니 어색했다. 예전만큼 자주 타지 못해 봄 가을 가장 날씨가 좋은 때만 가끔 자전거에 오른다. 그래도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를 때의 느낌을 좋아한다. 요즘은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가 좋다. 힘들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찬찬히 가다보면 한강이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용인신문 | 타국에 가서 꼭 가보는 몇가지의 공간이 있다. 문방구, 서점, 도서관…. 읽지도 못하는 공간에 왜 가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읽지 못하기 때문에 간다. 그림책도 있고, 사진 책도 있다. 알고 있는 책 표지를 만나면 신기하고, 한국 작가의 책을 만나면 반갑다. 책 디자인이 완전히 다르다. 베스트셀러 매대를 보면 어떤 책이 잘 팔리고 사람들이 어떤 곳에 관심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오늘은 세계에서 개인소유의 서점으로써는 가장 크다는 파월서점에 왔다. 미국 포틀랜드에 있다. 이게 도서관이야 서점이야 할 만큼 크고 진열이 잘 되어 있었다.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맘에 드는 책을 찾아 그려보며 서점 산책을 즐겼다. 지역작가들과 서점의 기념품, 퍼즐과 각 분야의 책들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편안했다. 역시 새로운 책을 만나기 위해서는 도서관보다 서점이 좋다. 앞면이 보이게 진열되어 있는 책도 더 많고, 더 다양한 제안과 추천이 있기 때문이다.
용인신문 | ‘춤을 추고 바라만 봐도’ 평화와 사랑을 페스티발로 구현한듯한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발. 멋진 아티스트를 보는 것도 좋았지만 행복해 하는 관객들을 보는 게 더 좋았다. 관객까지가 하나의 무대였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에 눈물이 고였을 정도. 좋은 표정의 사람들과 부는 바람, 나부끼는 비누방울, 맘껏 춤추는 사람들. 즐기는 아티스트와 행복해하는 사람들. 그 분위기가 아름다워서 빛나는 순간, 빛나는 사람들. 그 빛을 간직하고, 기록하고 싶다. 나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하고 싶어.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내고 오면 어떤 모습으로든 남는다. 사랑과 사람으로 남았다.
용인신문 | 오늘은 집을 나서는데 찬 바람이 불었다. 가을이 왔구나. 어제도 비가 왔는데 여름비였다면 오늘은 완연한 가을비였다. 계절이 바뀔 때의 감각이 좋다. 본가에 돌아오며 턴테이블과 시디피를 가져왔더니 아빠가 무지 좋아 했다. 오랜만에 김민기와 이상은의 LP를 들을 수 있겠다며. 짐을 정리하는 건 큰일이었고 내가 가진 짐은 많았다. 그래도 새로운 주인을 찾아간 물건들이 있어 다행이었다. 집정리 파티에 놀러 온 손님들은 수다떨다 시간을 훌쩍 넘겨 돌아갔다. 처음으로 전등도 바꾸고, 페인트칠도 하고, 시트지도 붙였던 집이다. 손님을 맞는 방법을 많이 연습했다. 많이 초대하고 잘 놀았다. 새벽에 혼자 나무 마루에 누워 크게 노래를 듣던 건 가끔 그리울 것 같다. 언젠가 내 공간이 다시 생긴다면 또 좋은 스피커를 구해야지.
용인신문 | 신기하게 일본어가 되는 날이 있고 안되는 날이 있다. 하루하루 기복이 있었다. 아침부터 일본어를 쓰면 밤쯤 되면 잘 들리지도 않고 말도 잘 안 나온다. 내 언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는 감각. 생각은 하는데 말은 나오지 않는 감각. 한국에 있을 때는 말을 ‘한다/안 한다’ 이지선다였다면 ‘시도한다’라는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 모르는 단어를 제외하고 설명하려면 ‘이걸 어떻게 말하면 전달될까‘하고 생각하고 길을 하나씩 만든다. 내가 전하고 싶은 말에 점을 찍고 멀리서부터 접근하는 방식으로 학창시절 이야기, 여행 이야기. 동일본대지진 때 한국인들의 반응,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들…. 질문에 대한 답을 더듬더듬 이야기하면 찰떡같이 알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