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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

류희의 증손 류근영은 독립운동가

3·1운동 ‘옥고’… 일제 신문조서 굴하지 않고 당당한 기개

 

용인신문 | 용인지역의 독립운동가 류근영(1897~1949) 선생은 지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언문지’와 ‘문통’의 저자인 서파 류희(1773~1837) 선생의 증손이고, 독립운동가인 몽양 여운형의 사돈인 류근영은 모현읍 일산리에서 태어났다. 여운형보다 어린 그는 여운형에게서 학문적, 사상적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류근영은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에 3.1만세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류근영은 어린시절에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로 이사가서 지냈고, 청년시절에는 경북 예천의 영신의숙에서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민족학교였던 영신의숙이 폐교하자 그 후 대창학원 등에 몸담았다가 1949년에 작고했다.

 

1992년에 뒤늦게 류근영이 독립운동을 한 사실이 인정돼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을 받고 현재 모현읍 선영 류희 묘 근처에 잠들어 있다.

 

류근영의 신문조서에는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게 된 이유를 당당하게 밝히는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조선총독부 판사 등이 열석한 가운데 판사 굴직희가 ”독립선언서를 보고 어떻게 생각했는가“라고 묻자 ”그것을 보고 기쁘게 생각하고 찬성하였다“고 답했다. 또 “어째서 독립운동을 희망하는가”라고 묻자 류근영은 “조선은 원래 독립국이었으므로 원래대로 독립국이 되고 싶다는 것과 일선인의 대우 차별이 있어 그 차별을 없애기 위해 독립을 희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큰 형인 류운영도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만세운동에 참여했지만, 신문 과정에서 동참자를 밝히라는 주문에 끝까지 함구했다.

 

류근영은 3.1만세운동뿐만이 아니라 할아버지 류희가 남긴 ‘문통’을 보존해 간행한 것은 큰 업적이다. 문통은 오늘날 조선 실학 세계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류근영은 15세까지 선비들로부터 전통 한학 교육을 받았고, 그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15세때는 신학사숙에서 수학했다. 학문에 막힘이 없던 총명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류근영은 일제강점기 때 증조할아버지 류희가 남긴 ‘문통’의 훼손을 우려해 급하게 경북 예천으로 옮겨 병산서원 유생들에게 통문을 돌려 문통 필사 등 출간 사업에 협조할 것을 요청했다. 문집 정리 및 발간에 많은 돈을 들여 남은 것 없이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류근영은 ‘문통’을 아꼈고, 문통 재정리 과정에서 위당 정인보 선생에게도 보여줬다. 그같은 노력으로 오늘날 연구자들이 류희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할 수 있다.

 

류희가 남긴 문통은 100여권의 거질로 이뤄진 방대한 백과사전적 저술로서 이곳에는 조선후기 정음학의 대가로 알려진 류희의 ‘언문지’를 비롯해 이사주당의 태교신기가 남아있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