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볼 줄 안다는 말이 있다. 오래된 물건의 가치는 골동품을 다뤄 본 사람이 알듯 사물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는 경험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노인 한 사람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속담처럼 경험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으랴.
나는 제법 빵을 볼 줄 안다. 언젠가 친구와 빵집에 간 적이 있다. 나는 각각의 빵이 뿜어내는 아우라에 이미 시각과 후각을 빼앗겼다. 내가 그렇게 넋이 나간 사이 친구는 천정이며 벽, 바닥 계산대의 마감처리를 스캔했다. 나는 빵을 보았고 친구는 공간을 보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나는 친구의 예리한 눈에 대해 놀란다. 사물을 볼 때 어쩜 그리 세심한 곳까지 보는지 모르겠다. 친구와 비교해 보건대 내 눈은 장식용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무엇을 보는 능력이 아주 한심한 것은 아니다.
친구에게는 아마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보인다. 매화 꽃눈이 언제 맺히는지. 동백이 붉은 입술을 발치에 떨어뜨리고 나머지 계절을 어떻게 견디는지. 시골 마을 저녁 가로등이 조용히 외로움을 밝히는 시간이 언제쯤인지.
그런데 보는 기능을 하는 눈은 몹시 이기적인 인체의 감각이다. 오로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본다는 것은 의지의 표현이다. 우리 몸에 있는 감각기관인 후각과 청각은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을 할 수 없으나 시각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여러 소리가 들리는데 어느 한 가지 소리만 선택하여 들을 수는 없다. 냄새도 선택하여 맡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택하여 본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 있다. 참가자들에게 여학생들의 농구를 지켜보게 하고 패스를 몇 번 하는지 보라는 주문을 했다. 이 과정에서 연구진은 경기 중간에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을 다녀가게 한 후 게임이 끝나고 참가자들에게 고릴라를 보았냐고 물었다. 절반가량만 고릴라 복장의 사람을 보았고, 나머지 절반은 패스를 세는 과제에 집중한 나머지 아예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을 심리학 용어로 ‘부주의 맹시’라고 한다. ‘부주의 맹시’는 인간의 눈이 얼마나 편파적이며 그와 동시에 엉성하기 짝이 없는지 알려준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도 이쪽 언론 다르고 저쪽 언론 다르듯 각자의 목적성만 지향한다. 같은 사건도 다르게 보는 정치인들을 보면 눈이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감각인지 깨닫게 된다.
벚꽃 피던 4월, 똑같은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서로 정치공세로 국민을 피곤하게 만들던 선거판. 이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는 끝났지만, 그들만의 ‘부주의 맹시’는 여전히 변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