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인간의 정체성 구성 방식은 근본적으로 재편되었다. 특히 소셜 미디어 환경은 현실 세계에서의 자아와 구별되는 디지털 자아를 형성하게 하며, 그 과정에서 ‘좋아요’ 버튼과 같은 상호작용적 장치가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디지털 자아는 단순히 온라인상에서의 표현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인정과 정체성 확인의 주요 통로로 기능한다. 인스타그램, 트위터, 틱톡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게시물에 부여되는 ‘좋아요’는 단순한 수치적 반응이 아니라, 개인이 타인으로부터 사회적 신뢰와 평가를 받았음을 경험하는 구조적 장치이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의 감정 상태와 자기효능감을 조절하며, 디지털 자아는 외부의 피드백을 통해 점차 형성되고 강화된다. 특히 청소년과 젊은 성인층에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며, 사회적 승인과 소속감을 향한 심리적 욕구가 디지털 상호작용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좋아요’가 제공하는 경험은 보상회로 활성화와 밀접히 연결된다. ‘좋아요’를 받는 순간 뇌의 도파민 분비가 촉진되며, 이는 보상 체계의 활성화를 통해 쾌락 경험을 강화한다. 이와 관련된 연구들은 소셜 미디어 상에서의 상호작용이 음식 섭취
용인신문 | 21세기 디지털 환경의 심장부에는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거대한 가상 네트워크가 자리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정보 전달의 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이 지식과 경험을 결집해 하나의 지적 생태계를 형성하는 장(場)이다. 특히 인터넷과 같은 디지털 미디어가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의 출현에 최적화된 이유는 바로 참여자 모두가 동등한 권력과 발언권을 행사하며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구조적 특성 때문이다. 전통적인 지식 생산 체계에서는 ‘전문가’와 ‘비전문가’라는 경계가 명확했다. 지식은 소수의 전문가 집단에서 생산되고, 다수의 대중은 이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이러한 위계가 약화되거나, 경우에 따라 완전히 해체된다. 익명성을 기반으로 한 가상 공간에서는 사용자의 사회적 지위, 학력, 경력, 심지어 연령마저도 정보 교환 과정에서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발화자는 오직 자신의 아이디어와 논리,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의 설득력으로만 평가된다. 이러한 구조는 ‘정보의 민주화’를 가능하게 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누구나 동등하게 정보와 의견을 게시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전문가와 일반인
용인신문 | 디지털 기술이 일상을 관통하며 새로운 문명을 이끌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더 이상 ‘현실’과 ‘가상’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가상공간은 단순한 정보의 저장소나 통신의 도구를 넘어서, 관계와 정체성, 공동체 형성의 주요한 무대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전 세계를 실시간으로 연결하는 온라인 플랫폼은 언어와 국경의 장벽을 허물고,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상호작용하는 새로운 관계망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사이버스페이스의 공동체는 물리적 접촉 없이도 사람들을 연결하며, 공유된 관심사나 목적을 중심으로 유연하게 형성된다. 과거에는 공간의 근접성과 시간의 일치를 전제로 관계가 맺어졌다면, 오늘날의 관계는 가상의 공간과 디지털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여 전개된다. 전 세계의 다양한 이들이 하나의 목적 아래 협력하거나, 콘텐츠를 중심으로 감정을 공유하고, 나아가 새로운 사회적 규범을 만들어내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특히 플랫폼 기반의 상호작용은 소속감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채팅방, 스트리밍 방송, 댓글과 실시간 반응 시스템은 사용자들 사이에 지속적인 소통을 가능케 하며, 단순한 정보 교환을 넘어서는
용인신문 |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치열한 생존 경쟁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개인보다는 조직이 창출하는 시너지 효과가 중요하며, 이는 구성원 간의 내적 조화를 바탕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공동체로서 기능할 때 발휘된다. 수직적 관계를 넘어 부문 간 수평적 교류와 협력이 이뤄질 때 조직은 보다 생명력 있는 유기체로 진화할 수 있으며, 이러한 건강한 공동체야말로 건강한 사회의 단단한 기반이 된다.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정가가 벌써 수면 아래에서 분주하다. 평온해 보이는 호수 위 오리의 치열한 발길질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각자의 셈법이 한창이다. 저마다 “내가 되어야 지역이 발전한다”고 외치지만, 그 외침이 과연 시민을 향한 진심인지, 아니면 자기합리화를 위한 자가당착인지 되물을 때다. 진정한 정치는 자기 확신을 소리 높여 외치는 데서 시작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를 냉정히 성찰하고 시대와 시민 앞에 진실되게 서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나는 왜 시장이 되려 하는가?”, “도의원, 시의원으로서 충분한 자질과 역량이 있는가?”, “지난 임기 동안 시민 앞에 부끄럽지 않았는가?” 이 근본적인 물음에 정직하게 답할 수 있어
용인신문 | 플라톤은 『국가』에서 놀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놀이를 통해 인간이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으며, 단순한 즐길 거리를 넘어 철학적 탐구의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실천과 경험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덕을 함양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지는 오늘날 게임이라는 매체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게임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 삶과 철학을 탐구하는 도구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에서 인간은 선택, 협력, 실패와 성장이라는 근본적인 경험을 반복하며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간다. 게임은 이러한 과정들을 극적으로 압축하여 보여줌으로써, 플레이어가 보다 본질적인 인간 경험을 체험하도록 돕는다. 고대 철학자들의 놀이 개념과 현대의 게임 이론을 연결해 보면, 게임은 단순히 소비되는 콘텐츠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모의 실험이며, 윤리적 선택과 사회적 협력을 경험하는 장이다. 예를 들어, 《언더테일(Undertale)》은 플레이어에게 비폭력적 해결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윤리적 딜레마 속에서 선택의 무게를 체험하게 한다. 이는 존 롤스의 정의론에서 말하는 “
용인신문 | 예로부터 군주는 백성의 삶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공자의 제자 안연은 노나라 애공에게 “새는 궁지에 몰리면 쪼고, 짐승은 물고 할퀴며, 사람은 거짓말을 합니다. 백성을 궁지에 몰아넣고 무사했던 임금은 없습니다”고 직언했다. 이는 곧 임금이라면 백성의 고통을 헤아리고 민생을 돌봐야 한다는 준엄한 가르침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여러 덕목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방외덕목’이라 불리는 백성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군주의 자리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중요한 가치다. 변변찮은 존재가 부모 잘 만나 권력을 쥐었다고 백성을 함부로 대한다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지 모르는 일이다. 백성보다 현명하거나 바르다고 할 수도 없는 자들이 권좌에 올라 백성을 다스린다면, 백성의 삶은 고통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임금은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배움을 통해 선비가 되고, 더욱 정진하여 군자에 이르며, 궁극에는 성인의 경지에 도달해야 백성은 편안하고 군주 또한 안전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군주들은 이를 외면했고, 그들의 말로는 감옥행이나 죽음과 같은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백성에게 누가 임금이 되든 큰 관심은 없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