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당 어르신들의 용인사랑 외면받는 역사의 현장 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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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장 정민섭 |
다산 정약용 선생의 후손으로 올해 85세인 정민섭 회장은 평소 향토역사에 조예가 깊었기에 용인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다. 이런 정 회장이 이한응 열사의 묘소를 답사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세 어르신은 결국 처인구 이동면 덕성리 산 70-1 굴암고개 남서쪽에 모셔져 있으며 향토유적 제49호인 이한응 열사 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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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응 열사묘 |
1902년(광무6년)에 영일동맹이 체결되자 우리 공사에 대한 영국의 태도가 불친절해졌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돼 우리 정부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기면서 부득이 공사관마저 철수하게 됐다.
그 치욕과 망국의 한을 참을 길 없어 이 열사는 귀국을 단념하고 임지에서 음독 자결했다.
이 공사의 비장한 최후가 본국에 알려지자 뒤이어 민영환·조병세 선생도 순국했고 전국 각처에서 분사자가 뒤를 이었다. 이 열사는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최초의 순국자로 우리 동포에게 민족적 울분과 분노를 폭발케 하는 기폭제가 됐다.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은 빙판길을 달려 이 열사 묘역을 향했지만 추운 날씨 탓인지 행인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다 민가에도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아 묘역을 찾는 데 갖은 애를 먹은 이들은 도착한 묘에 참배한 뒤 비문과 열사의 행적을 낱낱이 읽은 후 이구동성으로 “애국지사의 묘역이 이렇게 초라해서야 되겠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정 회장은 “‘민충정공(민영환 열사)’ 묘소와 ‘이준 열사’ 묘소는 사후 관리가 잘 되고 있는 데 반해 이한응 열사의 묘역에는 자그마한 비석과 상석이 전부다. 곡담도 너무나 짧게 조성돼 바람막이가 되지 않는 것은 물론 아늑함마저 없어 초라하기 그지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진 총무는 “우리가 살고 있는 향토 용인이 예부터 훌륭한 애국지사가 많이 난 곳이라는 것을 대개의 사람들은 잘 알고 있으나 유럽 영국 땅에서 1905년 꺼져 가는 고국의 운명 앞에 슬픔과 한을 품고 자결하신 이한응 열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우국자결열사 아니냐”며 씁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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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세 노인의 간절한 바람은 용인시와 경기도, 국가가 나서서 빠른 시일 내에 이 열사 묘역의 성역화를 이루어 온 국민들이 그를 기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지난달 31일, 회원 결속을 다지는 의미로 매주 토요일을 담소 또는 정례회의의 날로 정하고 첫 실행에 들어갔다.
쌀쌀한 날씨에도 20여 회원이 참석하는 성과를 보였으며 앞으로 정례화 하고 음식 준비까지 조를 정해서 실행하자는 의견에 모두 동참해 그 의미를 더했다.
지난 2001년 아파트 입주와 함께 시작한 경로당 모임은 처음부터 입주민들의 본보기였으며 어른으로서의 책임이 따랐다. 지금은 아파트 내에서 가장 따뜻한 정이 흐르는 경로당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정 회장은 “정의와 진리는 인간과 인간관계를 반듯하게 잡아주는 요인”이라며 “정직과 예로 분노를 무디게 하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