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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 김종경 칼럼
100년 전 용인은?

100년 전 용인(龍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용인신문이 10년 전 보도했던 <사진으로 보는 1900년대 초 용인 모습>을 다시 보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당시 보도 근거자료는 개화기 용인을 기록한 일본어판 사진첩이었다. 작고하신 서지학자 이종학(초대 독도박물관장) 선생께서 제공했던 자료다.

경기도내 수원· 용인· 이천· 여주 등 4개 군에 대한 명승고적 해설과 통계연보 비슷한 내용들이다. 총 60페이지에 52개의 사진이 있었고, 그중 용인자료는 25~30페이지에 걸쳐 사진 4장과 함께 게재됐다. 누가 찍었는진 모르지만 자세한 설명까지 곁들여 있어 눈길을 끌었다.

‘용인군세 약설’이라는 2페이지 기록엔 용인의 이모저모를 자세히 보여주었다. 당시 일문 번역은 고 박용익 선생께서 맡아주셨고, 신문보도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군청소재지인 수여면(현 김량장동)엔 200여 호에 1000여명이 거주했고, 장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장사도 비교적 잘 됐다. 호구 수는 조선인 1만 4000호에 7만 2000여명, 일본인 200호에 400여명이 살았다. 인구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였다.

행정구역은 12개 면, 245개리였다. 군 당국은 농업 장려와 연도식림(길가에 나무심기)에 힘을 써 실적을 올렸다.

그밖의 기관들을 보면 용인군청 헌병 분대, 용인우편소, 양지우편소, 용인금융조합, 백암 헌병파견소 등이 있었다. 외국인들이 많이 몰리면서 일본인회는 학교조합으로 변경됐고, 조합원은 내선인(일본인· 조선인)과 외국인을 합해 1000여명에 이르렀다.

타지방에 비해 소학교 창립이 지연, 대정3년(1914년) 심상소학교가 설립됐다. 공립보통학교 2개, 공립실업학교 1개, 사립학교 2개, 종교학교 1개가 있었다. 또 서당 105개가 있었던 것을 보면 구시대 교육에 힘썼음을 알 수 있다.

농업분야에서는 쌀· 보리· 콩을 주로 생산했다. 양질의 연초(담배)가 많이 생산되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연초구매조합이 설립되어 큰 창고 여러 동을 건축해 점차 규모를 확대해 갔다. 상업분야를 보면 군내에만 시장 3개소가 있었다. 금융은 일반적으로 자금이 풍부했고, 금융기관은 금융조합뿐이었지만 개인 유통도 상당했다. 근검저축조합은 14개였고, 인원은 8000여명, 금액은 1만원이 넘었고 금리는 모두 월4부였다.

당시 용인군은 금광이 풍부해 4광구, 사금 2광구를 출원 중에 있었고, 총면적 195만 3000평과 사금광 5만 9400평에서 모두 상당한 순이익을 올렸다. 아마 100년 전 용인은 ‘노다지’로 불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100년 전과 지금은 어떻게 다를까. 인구만 단순 비교하자면 총 7만2000명에서 2009년 현재 83만 명을 넘어섰다. 괄목할 만한 일은 지난 10년간 급속히 증가했다는 점이다. 구시가지 상업지역은 현재와 비슷하다. 지금도 쌀농사가 많지만, 축산 농가는 현대화의 산물인 것 같다. 30~40년 전 까지 만해도 흔했던 담배 농사가 사라졌다. 금광 역시 모두 사라져 폐광구의 흔적만 간신히 남아 있다.
무엇보다 100년 전과 현재를 위성사진으로 비교해 볼 수 있다면 어떨까. 최근엔 인터넷 ‘구글’과 ‘다음’에서 번지수까지 위성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기록엔 없었지만 수여선 철로가 지나갔던 일부 자리엔 현재 경전철이 건설 중이다. 초고층 아파트가 밀집된 택지지구, 30여개에 이르는 골프장, 그리고 사통팔달 뚫린 도로망 등 용인의 지도는 분명히 다 바뀌었다. 그렇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용인시다.

수많은 디지털 유목민들이 방랑하는 시대! 용인이여! 그럼에도 아직까지 변함없는 ‘고향’이라는, 아니 ‘용인’이라는 그 아름다운 이름 하나. 오늘은 세월의 징검다리위에서 만난 빛바랜 한 장의 사진 속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