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순자(荀子) 성악(性惡) 장 첫줄은 이렇다. 사람의 성품은 악하다(人之性惡). 그것이 선한 것은 가짜다(其善者僞也). 이를 삶속에서 증명해 준 여인들이 있었으니 세상은 이를 갑질삼모녀(甲質三母女)라 불렀다.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한 여자는 부자 남편을 두었고, 두 여자는 부자 부모를 두었다. 암튼 생전에 그녀의 남편이자 그녀들의 아비는 그런 처와 딸을 둔 탓에 온 국민 앞에 머리를 조아리기도 했다. 그걸 지켜보는 국민의 시선은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데 방점을 찍고 있었다. 맹자는 시경의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가 헤아려야 한다<타인유심他人有心 여촌도지予忖度之 맹자양혜왕장구상>고 했다. 가진 거라곤 돈이 전부인 저들로서는 남을 돌아본다는 것은 사치를 넘어 범죄행위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맹자의 생각은 달랐다. 측은한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無惻隱之心 非人也). 부끄러운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無羞惡之心 非人也). 사양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無辭讓之心 非人也). 옳고 그름의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無是非之心 非人也). 맹자 공손추장구상의 이 말은 ‘사람이 사람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용인신문]“신의 집에 있는 것이라곤 논어 <한권 중> 일부입니다. 그 반 권으로는 태조를 도와 천하를 장악했으며, 나머지 반 권으로는 폐하(2세 황제)를 도와 천하를 태평케 했습니다.” 송나라 300년의 초석을 놓은 승상 조보가 2대 황제에게 한 말이다. 흔히 일부천하평(一部天下平)으로 통하는 이 문장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한번은 꼭 읽어봐야 한다는 논어에 대한 치자들의 좌우서이다. 논어에는 많은 정치적 문답이 선문답처럼 산재되어 있다. 노나라 대부(大夫)이면서 실권자인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정치를 물으니 공자가 답한다. 정치란 바름이다. 네 몸을 바르게 이끈다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겠으며, 진짜로 네 몸을 바르게 하고 정치를 한다면 뭐 어떻겠냐마는. 그러나 네 몸도 바르지 못한 주제에 어떻게 남을 바르게 하랴. 정치하는 사람들은 치가 떨릴 만큼 바르게 살아야한다는 말이다. 계강자가 또 물었다. “나라에 도둑이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니 공자 답한다. “너만 욕심 부리지 않으면 된다.” 그러자 또 묻는다. “만약에 나쁜 놈이 있으면 잡아다 본보기로 죽이면 되느냐?” 공자의 답은 싸늘했다. “너만 착하면 백성들은 자연히 착해 질 것
[용인신문]맹자 양혜왕장구하편<湯放桀2-8>에는 임금을 죽여도 되는 군주시해론이 나오고, 맹자 진심장구상편<伊尹13-31>에는 임금을 쫒아내서 기어이 죽여 버리는 군주방벌(放伐)론이 나온다. 그러면서 예로든 전적(典籍)이 순자(荀子) 왕제(王制)편에 나오는 말로 원문은 임금은 배요<군자주야君者舟也> 백성은 물이니<서인자수야庶人者水也> 물의 힘으로 배가 뜨지만<수즉재주水則載舟> 물이 분노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수즉복주水則覆舟>. 그러면서 부언하기를 임금은 이를 염두에 두고 위기가 닥칠 때<군이차사위君以此思危>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해야 한다<즉위장언이부지의則危將焉而不至矣>. 이런 임금을 훌륭한 임금이라는 선왕(善王)이라하는데 맹자가 말하는 훌륭한 임금이란 간단하다. 산 사람은 잘 먹여 살리면서 죽은 사람은 잘 보내는 드리는데 서운한 점이 없게 하는 것. 이것이 이상적인 정치의 시작이다<양생상사무감養生喪死無憾 왕도지시야王道之始也>. 그러기 때문에 옛 군주들은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다가 편안한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인가를 근심하느라<명군明君
[용인신문]타향에서 뭇 사내의 유혹(誘惑)에 넘어가 그의 처로 살다 버림받은 아낙이 자신의 신세를 개탄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삼년 동안 그의 아내가 되어(삼세위부三歲爲婦) 방에서 쉼 없이 수고를 했거늘(미실로의靡室勞矣)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잠들며(숙흥야매夙興夜寐) 아침이 있는 줄도 모를 만치 일을 했지(미유조의靡有朝矣). 마침내 법적으로 혼인이 성사되니(언기수의言旣遂矣) 이때부터 남편은 돌변해 나를 패는구나(지우포의至于暴矣).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니(정언사지靜言思之) 내 팔자도 참 처량하다(궁자도의窮者悼矣). 시경(詩經)위풍(衛風)맹(氓)편(篇)에 기록된 이 노래는 옛 사람들이 못된 군주 또는 무능한 군주를 논할 때 가끔이지만 들먹이곤 하는 문장이다. 풀어보면 “그가 훌륭한 군주인줄 알고 삼년동안 뼛골 쑤시게 그를 위해 일했거늘 백성을 위하기는 고사하고 되레 백성들의 고혈을 빠는 천하의 악인”이라는 한탄의 노래다. 여기에 본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듯한 후대에 두고 두고 명문이 되는 유명한 사자성어가 나오는데 숙흥야매(夙興夜寐)다. 본래의 뜻은 ‘남편(군주)을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일을 하느라 밤늦게 잠들며’라는 말인데 송말원초(宋末元初)의 인물로 자를 무
[용인신문]공자가 55세에 소정묘를 단칼에 베고는 56세에 주유철환을 떠났다. 그 당시 사람들은 공자가 천하에 숨겨놓은 스승이 있다고 믿었다. 그동안 밑천이 다 떨어져서 남모르게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기 위해 최측근 제자 일부만 데리고 여행을 감행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제하제자諸下弟子들의 호도된 여론 속에 시작된 여행은 자공 개인 돈 연 230억 원을 써가며 14년간 70개국을 돌아다녔다. 결국은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끝으로 70세에 이르러 돌아온다. 그럼에도 여행에 동행하지 못한 제하제자들은 여전히 “공자께서 따로 스승을 두고 공부를 했을 것이다.”라는 오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이런 의문을 가진 제자들에게 공자는 정색을 하며 말한다. 너희들은<이삼자二三子> 내가 뭔가를 감춰 놓은 게 있다고 생각하는구나<이아위은호以我爲隱乎>. 나는 너희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오무은호이吾無隱乎爾>. 또한 지금까지 너희와 함께 하지 않은 것조차도 없거늘<오무행이부여이삼자자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이것이 나다<시구야是丘也. 논어술이7-23문장>. 그러면서 뼈아픈 고백을 하는데 논어의 이 대목에 이르면 울컥하며 콧
‘국회의원을 밀어?’ 어느 국회의원이 했다는 지극히 짧은 단발마 탄성은 말의 인플레이션을 느낀다. 아니 권력 맛에 기울어진 인성의 정체성에 대한 절창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을 밀어?’라고 했어도 그 두려움은 만만찮았을 텐데 ‘국회의원을 밀어?’라는 말 한 마디 속에는 본인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 따라 가공할 수 없는 공포로 다가올 수도 있다. 힘없고 그야말로 들풀보다 더 여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들이 한 표씩 찍어줘서 저들은 국회의원이 됐다. 선거 때는 코가 땅에 닿도록 굽실거려가면서 세상에 이보다 더 착하고 이 보다 더 예의바른 사람은 아마도 없을거야라는 듯이 한 표를 위해 온갖 겸손과 갖은 아양을 떨때가 있었거늘. 이젠 금뺏지 달았으니 적반하장 플러스 안하무인격. 의원님 됐다 이거지? 이런 보도를 접할 때마다 뒷맛이 개운치 않다. 아니 일주일 내내 기분이 나쁘다. 또 다른 어느 국회의원은 누군가에게 인간으로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 부었다 한다. 당사자는 모멸감에 치를 떨며 하소연은커녕 찍소리도 못 내고 서둘러 사표를 쓰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이리라. 해당 국회의원은 사과문 몇 자 읽고는 ‘뭐 어쩌겠어. 대한
원양이 불량한 자세로 공자를 맞았다<원양이사原壤夷俟>. 이 모습을 본 공자는 말한다<자왈子曰>. 어려서는 껄렁껄렁하더니만<유이불손제幼而不孫弟> 커서는 이룬 게 없으며<장이무술언長而無述焉> 늙어서도 죽지도 않으니<노이불사老而不死> 저런 걸 도적이라 한다<시위적是爲賊>. 이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본 본 자공은 이렇게 후주를 달면서 문장을 끝맺는다. 선생님께서는 작대기로 원양의 정강이를 툭툭 치셨다<이장고기경以杖叩其脛>. 이 글은 논어 헌문 편 46문장에 나오는 전문이다. 공자가 일생을 살면서 제자를 포함해 한 인간을 이 지경까지 몰아 부친 경우는 논어 499문장 중 일곱 문장쯤에 달하는데 그중 단연 압권일 것이다. “네깟 것이 논어를 알기나 하랴” 라며 이등박문에게 소리쳤다는 고홍명의 말 중에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는 독설이 있다 한다. 공자가 원양에게 했다는 헌문46문장의 말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는 않으리. 얼마나 막돼먹고 돼먹지 못했으면 나무 작대기로 정강이를 툭툭 쳐가면서까지 이렇게까지 했을까. 이와 같은 일이 공자의 그 사건이 있은 지 장장 2500년이 훨씬 지난
혹자가 노자老子의보원이덕報怨以德에 대한 말을 듣고 공자에게 묻는다. “덕으로 원수를 갚는다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물으니 공자 답한다. “원수에 대해서 덕으로 원수를 갚아버리면 누군가로부터 덕을 입었을 때는 그 덕은 무엇으로 갚겠는가.” 그러면서 그 답을 주기를 “원한은 내가 바르고 곧게 사는 것, 즉 곧음으로 원수에게 보답하고 내가 입은 덕은 베풀어 주는 덕으로 갚아야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를 후끈 달구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탄핵으로 중도하차한 후 감옥에 있는 전직 대통령 박근혜의 석방문제다. 더군다나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감옥을 들락하는 지경이다 보니 그쪽을 지지하는 당과 그 추종자들의 입장에서 볼 땐 정치보복이라는 단어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쯤에서 중요한 것은 민심이다. 논어 자로子路편에 섭공葉公이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으니 공자孔子가 답한다. “가까이에 있는 이들은 기쁘게 하고, 먼 곳에 있는 이들은 오게 하면 된다<近者悅, 遠者來>”라는 말이다. 선문답 같은 이 말속에는 관자가 말하는 정치의 요체가 들어 있다. 관자 목민 편에서 ‘정치가 흥하는 것은 백성의 마음을 따르는 데 있고, 정치가 망하는 것
계강자는 계손씨로 노나라의 권문세도가 삼가문三家門 중 가장 세력이 강한 집안으로 애공을 도운 공자와는 이를 북북 갈 정도의 원수지간이다. 그렇다고 공자의 사회적 위상이 감히 함부로도, 그렇다고 멀리 할 수도, 가까이 할 수도, 그 어느 것도 마뜩찮게 할 수 없는 그런 관계인데 하필 애공哀公 3년 7월 계강자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다. 당시 계씨 집안의 최고 실권자 兄계손사가 첫 아들이 막 태어남과 동시에 비명횡사한다. 이에 동생 계강자는 이때를 틈타 이제 막 태어난 형의 아들이자 장차 계손씨 집안의 실권자가 될 조카마저 죽이고, 계손씨 집안의 실권자가 된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껄끄러운 관계의 공자를 초빙해 정치에 대해 묻는다<계강자문정어공자왈季康子問政於孔子曰>. “만약 도가 없는 사람을 죽여서<여살무도如殺無道> 도가 있는 사람을 성공시켜준다면<이취유도以就有道> 괜찮지 않겠습니까?<하여何如>” 공자 답하길<공자대왈孔子對曰> “정치를 하면서<자위정子爲政> 사람까지 죽일 필요가 있겠는가?<언용살焉用殺. 論語顔淵>”. 어린 조카를 죽인 것에 대한 공자의 일침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
사마천司馬遷은 48세에 생식기를 뿌리째 뽑아 토막 내 짐승의 먹이로 던져지는 치욕적인 형벌 궁형을 당하고도 기어이 살아남아 사기史記라는 걸작을 남긴 인물이다. 그가 자신 만큼이나 불행했던 벗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사람이라면 최소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독백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인개유사人固有一死)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혹중어태산或重於泰山),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나니(혹경어홍모或輕於鴻毛)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용지소추이야用之所趨異也).”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벗 임안에게 보내는 답장> 이글에 대한 부안설을 찾으라면 아마도 누가복음 12장20절이 그중 가장 적절할 것이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마음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젊은 날 글방 훈도였던 탓에 미염공 한수정후 운장 관우는 평생을 공자孔子가 쓴 춘추春秋 책을 좌우서左右書로 수불석권手不釋卷하며 살았다. 이문열 평역 소설 삼국지 4권 소제목에서조차 ‘드높구나. 춘추春秋의 향내여’라며 관우가 춘추 책을 어떤 심정으로 대하는가를 명징하니 기록한다. 관우의 모든 초상화에는 언제나 한 손에 춘추대도春秋大刀라 불리는 청룡언월도가 있고, 다른 한 손엔 춘추 책을 들고 있으며 초상화 화제 또한 ‘뜻은 춘추에 있다’는 지재춘추志在春秋로 간담이 서늘하다. 쉽게 말해 춘추의 정신으로 산다는 말인데, 산동의 공자가 지은 춘추를 산서의 관우가 읽었다는 말이다. 관우가 조조의 포로가 되어 생사를 모른 채 헤어진 의형제 유비를 만날 때까지 머물던 조조진영의 관우 숙소 이름 또한 춘추 책을 읽는 집이라는 뜻의 춘추각이다. 우리나라 청와대에도 춘추책의 이름을 딴 제하의 각이 있는데 춘추관이 그것이다. 춘추란 서릿발 같은 엄정함으로 정의를 잃지 않겠다는 말임에는 분명할 터. 일찍이 유향劉向은 춘추의 가르침을 설원說苑권삼卷三건본편일建本篇一본도本道 말미에 칠언대구七言對句으로 정리 왈曰, 바른 봄이 있다면 어지러운 가을은 없으며<유정춘자무란추有正春者無亂秋
맹자가 제나라 선왕과 도담을 나눈다. 군주가 신하를 자신의 손발처럼 소중하게 여기면 신하는 군주를 자신의 심장 같이 여길 것이고, 군주가 신하를 개나 말처럼 하찮게 여긴다면 신하는 군주를 자신과 아무 관계없는 일반인 정도로 여길 것이다. 군주가 신하를 흙덩이나 지푸라기 같이 천하게 여긴다면 신하 또한 군주를 원수로 여길 것이다. 이 말 끝에 나온 말이 나라의 형벌을 맡은 법무부장관이 자기 휘하의 관원들이 백성들의 죄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런 법무부장관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왕은 일언지하에 “그런 무능한 법무부장관쯤은 즉시 파면해 버리겠다”고 답한다. “그랬음에도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소?”라며 재차 물으니 “이쯤에서는 왕이 좌우를 둘러보고 딴전을 피우며 다른 이야기를 하더라”고 맹자 책은 기록하고 있다.<왈曰 사사불능치사士師不能治士 즉여지하則如之何 왕왈王曰 이지已之 왈曰 사경지내불치四境之內不治 즉여지하則如之何 왕고좌우이언타王顧左右而言他. 梁惠王下6> 가정이든 사회든 국가든 어느 곳에서든 천하의 근본은 한 사람에서 비롯된다.제나라 사람으로 금을 탐낸 자가 있었다. 아침에 옷을 입고 시장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