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을 사랑했던 아버지에게 시각적 재능 물려받고
음악을 좋아했던 어머니에게 정서적 풍요로움 유산
명문가 며느리로 남편 내조 한평생… 나이들어 헛헛함
인생 황혼 붓들자 그동안 숨겨왔던 예술혼 활활 타올라
‘극사실주의 기법 ’ 캔버스 속 와인잔과 체리 진짜로 착각
용인신문 |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 투명한 와인잔에 영롱하게 피어나는 거품. 그 찰나의 순간을 캔버스에 영원히 담아내는 이복희(88) 화백. 1937년생, 여든여덟의 나이에도 그의 눈은 소녀처럼 빛나고, 붓을 쥔 손은 정교하게 움직인다. 예순이라는 늦은 나이에 처음 붓을 잡았지만, 그녀의 그림에는 수십 년을 그림과 함께 살아온 대가(大家)의 깊이와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와인잔 작가’로 알려진 그녀의 극사실주의 작품들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삶의 희로애락과 우주의 심오한 질서를 담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작업실에서 만난 이복희 화백의 삶과 눈부신 예술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 예술가의 씨앗을 품은 유년 시절
이복희 화백은 1937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예술가 집안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유년은 예술적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풍요로운 환경이었다. 특히 그림을 좋아했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녀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중학생의 나이로 선전(鮮展,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할 만큼 재능이 뛰어났다. 그러나 ‘예술가는 집안을 망하게 한다’는 그 시절의 편견에 꿈을 접고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은 평생 이어져, 방학이면 늘 그림을 그렸고, 6.25 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유명 화가들을 집으로 초청해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
“아버지는 늘 스크랩북에 모네나 마네 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부터 다양한 명작들을 오려서 붙여 놓으셨어요. 그걸 몇 권이나 만드셨죠. 저는 어릴 때부터 그 스크랩북을 보며 자랐고, 아버지께서 그림 그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게 큰 즐거움이었어요.”
아버지의 스크랩북은 어린 이복희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미술 교과서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상상화를 그리라는 과제에 그녀는 스크랩북에서 본 모네의 그림을 떠올렸다. 노을 지는 바닷가의 오두막집 풍경을 그렸는데, 특히 하늘의 노을이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다채로운 색으로 표현했다. 그녀의 그림을 본 선생님은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느냐”며 깜짝 놀라 칭찬했다. 아버지가 잎사귀를 칠할 때도 초록색 한 색만 쓰지 말고 노랑, 연두, 초록 등 여러 색을 섞어 쓰라는 가르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영어에 능통하고 풍금도 쳤던 어머니 또한 그녀의 감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명문으로 꼽히던 동래일신여학교를 졸업한 신여성이었다. 어머니는 부산아동자선병원에서 봉사 활동에 헌신하면서도, 집에서는 늘 만토바니 악단의 슈베르트의 세레나데 등 감미로운 세미클래식 음반을 틀어놓았다. 집에 들어서면 마당까지 울려 퍼지던 아름다운 선율은 어린 딸의 감수성을 한껏 자극했다. 어머니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적십자자원봉사유공장을 수여 받았다. 이처럼 아버지에게서는 시각적 재능을, 어머니에게서는 정서적 풍요로움을 물려받으며 이복희라는 예술가의 씨앗은 조용히, 하지만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 현모양처, 그리고 60세의 화가 지망생
어릴 적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였지만, 그녀가 바로 화가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다. 피아노에 재능을 보여 음대 진학을 꿈꿨지만, 당시 부산에는 음대가 없었고, 완고했던 부모님은 고명딸을 서울로 유학 보낼 수 없다며 반대했다. 결국 그녀는 결혼을 해도 대학원을 보내준다는 조건으로 부산대학교 가정과에 진학했다.
대학 3학년이던 22세에 유서 깊은 명문가 집안의 장래가 촉망되던 생화학도와 결혼했다. 남편은 윤관 장군의 후손이었다. 그녀는 본인의 석사과정 공부를 중단하고 남편이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편을 잡았다. 이후 세 아이의 어머니이자, 연구와 학회 활동으로 바쁜 남편을 묵묵히 뒷바라지하는 현모양처로 살았다. 뜨개질, 매듭 공예, 자수 등 손으로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지만, 그 재능은 오롯이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
“아이들 다 키우고 남편도 퇴직하고 나니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것 같았어요. 편안해졌는데, 오히려 우울증 비슷하게 오더라고요.”
허탈감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오랜 동창이 “아버님도 그림을 잘 그리셨으니, 너도 한번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했다. 예순의 나이, 그는 용기를 내 화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를 처음 가르친 남기종 화백은 그녀의 그림을 보더니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고 평했다. 그녀는 먼 길을 돌고 돌아 드디어 자신의 길을 찾았다.
그때부터 그녀의 숨겨져 있던 열정은 무섭게 타올랐다. 남기종 화백이 갑자기 타계한 후에는 프랑스 유학파 출신의 풍경화가 김보연 화백을, 이후에는 정물화의 대가로 꼽히던 김윤식 화백을 스승으로 모시며 그림을 배웠다. 명일동 집에서 경기도 오포에 있는 화실까지, 누구보다 먼저 도착해 그림 그릴 준비를 마쳤다. 하루 6시간씩 그림에 몰두했고, 손목 터널 증후군으로 세 번이나 수술을 받고 허리에 핀을 6개나 박을 정도로 지독하게 그렸다. 남편은 “취미로만 하라”며 걱정했지만, 그녀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 와인잔, 찰나와 영원을 담다
풍경화에서 정물화로, 그녀의 그림 세계는 점차 깊어졌다. 집중력이 뛰어난 그녀는 100호짜리 국전 입선작도 3개월만에 완성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시그니처가 된 ‘와인잔’ 시리즈가 탄생했다. 운명적인 발견은 남편의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남편과 음악을 들으면서 와인과 커피를 마시곤 했는데 겨울에는 거실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요. 어느날 잠시 안에 있는데 남편이 ‘여보, 나와서 이 빛 좀 봐’ 하고 부르더군요. 와인잔과 체리에 반사되는 빛이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그 순간에 영감을 얻어 와인잔을 그리기 시작했죠.”
그녀의 와인잔 그림은 극사실주의 기법을 따르지만, 단순히 대상을 똑같이 그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와인잔에 담긴 거품을 통해 ‘찰나와 영원’이라는 주제를 탐구한다. ‘크샤나(Kṣaṇa)’는 산스크리트어로 ‘순간’ 또는 ‘찰나’를 의미한다. 피어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거품은 유한한 인간의 삶과 찰나적인 행복을 상징한다. 그녀는 덧없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해 캔버스 위에 영원의 생명을 불어넣는다.
김보연 선생은 세계에서 아무도 이런 작품을 하는 사람이 없다며 그리라고 했다. 한국미협 회장도 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고 했다. 그녀는 중간에 다른 그림을 그리려고도 했으나 주변의 유명한 작가들이 절대 놓지 말라고 만류했다.
작업 과정은 고도의 집중력과 섬세함을 요구하는 수행(修行)에 가깝다. 시럽에 식용 색소를 섞어 원하는 색의 액체를 만들고, 빨대로 숨을 조절해 불어가며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거품을 만든다. 계절과 빛의 방향에 따라 거품 색이 달라지는 결정적인 순간을 사진으로 찍은 뒤, 거대한 캔버스에 옮긴다. 특히 영롱하게 빛나는 거품을 표현하는 작업은 극도로 예민하고 섬세해서, 1호 크기의 가는 붓으로 그리는데 거품 몇 개를 그리고 나면 붓이 망가져 더는 쓸 수 없을 정도다. 한 미술평론가는 그림을 보고 “이 작가의 와인잔 안에는 우주 공간이 다 들어있다”고 극찬했다. 실제로 그녀의 그림 속 와인잔에는 창밖 풍경과 하늘, 심지어 작가 자신의 모습까지 비치며 무한한 공간감과 깊이를 느끼게 한다.
# 끝나지 않은 예술혼, 무지갯빛 꿈을 그리다
“그림을 그릴 때 가장 행복해요. 행복한 시간을 그림에 담으니 제목도 ‘셀러브레이션(Celebration)’이라고 붙였죠.”
이복희 화백의 작업실에는 완성된 대작들과 이제 막 시작한 미완의 작품들이 함께 숨 쉬고 있었다. 100호가 넘는 대작을 완성하고 나면 몸살을 앓기도 하지만, 그녀의 창작열은 식을 줄을 모른다. 최근에는 작품에 무지개색을 넣어보고 싶다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예술적 감수성을 키웠고, 한때는 꿈을 접고 현모양처로 살았지만, 예순의 나이에 다시 붓을 들어 마침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활짝 꽃피운 이복희 화백. 그녀의 삶은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는 말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찰나의 빛을 영원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그녀의 붓끝에서 또 어떤 경이로운 우주가 펼쳐질지, 앞으로의 작품 세계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녀의 예술 여정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