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덕여왕 때에 알천임종호림술종유신염장이 남산 무지암에 모였다. 이때 호랑이가 나타나 좌석 가운데로 뛰어들자 모두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은 태연히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 메어쳐 죽였다. 알천의 힘이 이와 같으므로 회의의 첫 자리에 앉았으나, 사람들은 모두 유신의 위엄에 복종하였다.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로 신라 최고의 귀족들이 회의하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신라에는 성스러운 장소가 네 곳이 있어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대신들이 그곳에 모여 의논하면 반드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라고 써있다. 이 성스러운 장소들이 동쪽의 청송산, 남쪽의 무지암, 서쪽의 피전, 북쪽의 금강산이라고 밝혀놓고 있다. 화백이라는 회의의 명칭은 중국의 신당서에 최초로 나타나는데, 통일 신라 이전에는 다르게 불렀을 수 도 있다는 의미이다. 회의 장소가 대부분 산봉우리,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개최한 것으로 볼 때 아주 오래전부터 신성시 된 곳이다. 이는 부족사회의 공동집회에서 유래한 것으로 6촌(村)락에서 출발한 신라가 어느 정도의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하는 과정인 6부(部) 사회체제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났을 것이다. 하나라도 반대하는 세력이 나타나면 국가의
우리 역사 교과서에서 식민지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단 한차례이다. 1910년부터 1945년 일본의 지배를 받은 시기 뿐이다. 하지만 좀 더 냉정하게 보자면 1945년부터 1948년 까지 미 군정의 지배를 받은 것과 고려말기의 원 간섭기도 식민지와 비슷한 경험이다. 중국 왕조에 대해 사대는 했어도 정치구조의 완전한 형태로서의 지배는 한족이 아닌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시기가 최초였다. 역사교과서에는 몽골과 강화를 맺었다와 자주성에 많은 손상을 입었다고 되어 있지만 이건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뜻의 온건한 표현일 것이다. 요즘 방송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무신]에서 장엄한 전쟁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몽골의 침략에 맞선 것은 고려의 군대 보다는 일반 민중의 처절한 생존싸움이었다. 1231년 살리타의 침입으로 시작된 몽골의 공격은 28년간 7번 동안이나 계속됐다. 강화도에 갖혀 있던 고려의 고종이 1259년 태자를 인질로 보내는 항복의 조건으로 전쟁은 끝났다. 인질로 갔던 태자가 귀국하여 원종으로 즉위한 시기에는 항복은 했지만 원의 직접 지배를 받지는 않았다. 이후 벌어진 개경환도와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과정에서 원나라는 다루가치를 설치한다. 다루가치란 진압하는 자라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