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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

여성독립유공자 정정산 지사 친정집의 비운

친정손주 정인호·정인희 형제 ‘애타는 사연’








[용인신문] 올해 3.1 운동이 100주년을 맞았지만 대한민국의 21세기는 여전히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6.25를 관통하는 상처가 깊다.


해주오씨 용인 3대 독립운동가 집안의 며느리이자 만주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렸던 여성독립운동가 정정산(1900~1992·애족장) 지사의 친정집도 예외가 아니다.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화산리 정지사 생가에서 만난 친정손주 정인호(67·전 이동농협 전무정인희(63·전 고교 교사) 형제의 얼굴에 드리운 짙은 그늘.


역사 뒤편에서 무기력하게 아픈 가족사를 대물림 하고 있는 2세대, 3세대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동안 아무도 풍비박산 난 정정산 지사 집안의 사연을 들어준 이가 없었다. 봇물 터지듯 많은 말을 쏟아낸다.


저희 대고모할아버지 오광선장군 일가족이 일제강점기 때 만주로 망명가면서 정정산 대고모 할머니도 만주로 가셨잖아요. 우리 아버지가 정기영인데, 6남매 중에 5째에요.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우리 큰아버지가 만주로 가셨고, 그 밑에 둘째, 셋째 큰아버지랑 고모가 원산으로 가셨어요. 다행히 고모는 6. 25 흥남철수 때 돌아오셨지만, 나머지 분들은 한분도 돌아오지 못했어요.”


초계정씨 박사공파 용인 강헌공파 종손집안인 정정산 지사의 친정이 독립운동과 연관되게 된 것은 정지사가 오광선 지사와 혼인하면서다. 시아버지 오인수 의병장이 8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고, 남편 오광선을 비롯한 시댁 식구전체가 만주로 망명길에 오른 독립운동가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안은 문관이에요. 독립운동에 연유가 된거는 대고모할머니가 그리 시집을 가셨기 때문이고. 큰아버지가 만주로 가신 연유가 일제강점기 때 집안 내력이 그러니까. 여기 일본 순사들이 괴롭히니 피해서 간 것도 있고, 땅도 잃고 먹고 살기 어려워 간 것도 있고 양쪽이 있겠죠. 광복이 되고도 못 오셨어요. 둘째, 셋째 큰아버지하고 고모는 원산에서 터를 잡으셨는데 6.25 , 흥남철수 때 배타고 오려고 가족이 다 나왔는데 배가 안 떠나고 언제 떠날지도 모르니까 집에 살림을 하나라도 더 가져오려고 잠깐 갔다가 그사이 배가 떠난거에요. 고모만 애들 데리고 나왔어요. 그래서 우리 사촌들이 흑룡강에도 있고, 북한 원산에 있는 사촌들은 연락이 안되죠.”


큰아버지가 조선족이 됐다. 정정산 지사의 친정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식구가 다 흩어진거죠. 그 바람에 우리 할머니가요 정신을 놓으셨어요, 생떼같은 아들 셋을 잃어버렸지 딸 잃어버렸지. 그러니 부모가 어떻게 온전한 정신에 사실 수 있겠어요.”


정정산 집안은 이같은 엄청난 비극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도 못한 채 삭히고 살아왔다. 다행히 아버지 생존시 만주에 가서 큰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왔다. 북에 있는 친척은 당연히 재회를 못했다.


제가(정인희) 대학 1학년 땐가, 2학년 땐가, KBS방송국에서 공산권에 계신 동포에게그런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늘 아버지한테 들은 거니까 가족이야기를 쭉 해가지고 방송국에 보냈더니 방송이 됐대요. 만주에서 얼마만에 편지가 왔어요. 82년도에요. 거기가 흑룡강성 무량수전이래요. 그래서 편지왕래를 했어요. 96년에 중국하고 수교가 돼 여름방학 때 아버지를 모시고 거길 갔어요. 하얼빈 공항에 내려 거기서 1박하고 버스타고 한 7시간, 8시간 가니까 무량수전이라는데가 있는 거에요. 밀산시. 거기 조선족 마을에서 큰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큰 사촌형을 만났어요. 큰아버지가 옛날에 살던 집이 남아있다고 해서 가봤더니 움막이에요. 반은 땅속에 있고 반은 땅위에 있고. 저희 아버지가 보시고는 이렇게 사실거면 고향으로 오시지 왜 여기서 이러고 사셨냐며 슬퍼하셨어요.”


오광선 지사와 혼인 이후 독립운동 고행의 길

일본 순사들 핍박에 형제들 중국 만주·원산행

정 지사 환국후 이곳에서 한해 몇달씩 머물러

생가 존폐위기 정부서 제발 보존해 줬으면


실질적인 종손인 큰 사촌형님은 농업대학을 나와 수전양궁장이라는 종자보급소장을 하고 있었다. 그 후 초대해서 용인 집에도 왔고, 다른 사촌들도 한국 나와서 일도 했으나 형님들이 별세한 후 요새는 다소 멀어진 상태다.


아버지 정기영씨는 광복후 정지사가 이시영 부통령한테 부탁해 195011일자로 영종초등학교 교사발령을 받은 후 평생 교사로 정년퇴직했다. 6.25때는 빨갱이에 쫓겨 집에 들어오지도 못한 채 안성 외가댁 쪽에서 정처 없이 돌아다녔고, 수복 후에는 동네의 빨갱이들이 잡혀가는 등 동네의 수난사이자 우리나라의 비극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정 지사는 광복후 만주에서 환국해 죽능리 시댁, 서울 자식집도 오가면서 살았지만, 살림이 힘들어 친정집(정지사 생가)에 와서 한두 달, 세 달씩 머물렀다.


농사일 도와주고 쌀 가져가시고 그랬어요. 여기서 시궁산을 넘어다녔어요(시궁산 너머 동네가 시댁인 원삼면 죽능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우렁차고 아주 엄했어요. 오광선 대고모할아버지도 여기 짚차 타고, 말도 타고, 권총차고 오신적도 있었대요. 광복후 광복군 소장(별 하나)으로 환국해서 육사8기 특별간부반 마치고 대령 다셨지만 정지사와는 따로 사셨어요.”


(정인희)는 들은 얘기, 특히 막내아들한테 아픈 얘기를 자주 하는 편인데 어떻게 잘 조절 해서 얘기를 할까 항상 고민스럽죠. 오광선 장군에 대해서는 자식들이 자랑스러워 합니다. 막내 아들이 캐나다 유학중인데 선생이 일본계 캐나다인이래요.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통치하면서 얼마나 나쁜 짓 많이 했냐. 토론이 벌어졌는데 오광선장군에 대해 이야기 했다고 전화가 온 적도 있어요.”


정정산 지사는 만주에서 하루에 열두 가마솥을 독립군에게 밥을 해주고, 말 키워서 군자금을 조달했다. “조강지처로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광복후에도 힘들게 사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이런 분을 어떻게 보상할거에요. 잘 기록해서, 이런 게 문자 기록만이라도 남아있으면 그걸로 족해요. 그리고 여기가 정정산 지사 생가 아닙니까. 생가터 안내판도 설치해주고 생가도 보존해주면 좋겠어요. 우리는 여기서 살 필요도 없고.”


정인호씨는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정인희씨는 분노했다. 독립유공자 자손들이 정부 초청 등 따뜻한 위로를 받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정정산 지사 친정 후손들은 무관심속에서 슬픈 가족사에 흐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