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농장 ‘폴리타젤의 기적’ 주역 황만금(黃萬金)

용인신문은 ‘3.1운동 ·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항일운동가인 홍범도 장군이 잠들어있는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와 우즈베키스탄에 생존중인 고려인 1세대들을 취재해 보도하기로 했다. 이번 기획은 지난 2월1일부터 2월9일까지 중앙아시아 전문가이자 더불어민주당 내 ‘3·1운동 ·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특위’ 집행위원을 맡은 이우현(용인병) 지역위원장과 공동으로 추진한 동행 취재 연재물이다.어려운 여건과 촉박한 일정에도 동행 취재에 적극 협조해준 이 위원장과 현지 안내와 통역을 맡아준 키르기스스탄의 졸도쉬와 마흐무트, 그리고 우즈벡키스탄 국립체대 백문종 교수, 타슈켄트 세종학당 허선행 학당장, 타슈켄트 아리랑 요양원 김나영 원장, 민족지도자 황만금 선생의 둘째아들 황스타니슬라브씨 등 수많은 고려인들과 교민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편집자 주>

➀카자흐스탄의 ‘홍범도 장군’묘역을 찾아

➁‘아리랑 요양원’ 고려인 1세대를 만나다

➌고려인 민족지도자 ‘황만금’과 ‘폴리따제’

➃고려인 노동영웅 ‘북극성’지도자 ‘김병화’

한국인들이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을 때 고려인(카레예츠)의 흔적을 찾아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 중의 하나는 ‘김병화 박물관’이다. 몇 년 전, 기자도 언론인 연수를 갔을 때 김병화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우현 위원장 역시 김병화 박물관을 수차례 방문했다고 한다.

그런데 구 소련 시절 최고의 집단농장은 ‘폴리타젤(Politadel)’이었고, 그곳엔 황만금(黃萬金1919년~1997)이란 지도자가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고려인 1세 어르신들이 있는 타슈켄트 ‘아리랑 요양원’ 방문을 마친 후 우리 일행은 세종학당 허선행 학당장의 안내로 황만금의 둘째 아들인 황스타니슬라브 티모페예비치(Stanislav Timofeevich‧ 77세)씨를 인터뷰할 수 있었다. 황만금은 이미 국내 학계와 출판계를 통해 알려졌으나 기념관이나 박물관이 없어서인지,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매우 낮았다. 아니면, 나중에 무죄였음이 밝혀졌으나 ‘면화스캔들’에 연루되었던 탓이었을까.

황만금은 1919년 5월 1일 연해주 포시예트(Posyet) 지역의 노보키예프스키(Novokievskii)에서 황수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1년에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에서 출생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스타니슬라브는 아버지가 생전에 여러 차례 1919년생이란 말을 했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올해가 황만금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 뜻깊은 해에 그의 혈육을 인터뷰하는 것 또한 큰 행운이 아닐수 없었다.

스타니슬라브를 만나러 간곳은 유카리치르칙군 듀스틀릭 마을이다. 칠십 대 후반인 그의 얼굴에서는 생전의 황만금 선생 얼굴이 오버랩 됐다. 머리칼은 희었지만 매우 건강해 보이는 그는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점심때가 지난 늦은 오후 시간이라 과일과 차가 나왔다. (여담이지만, 고려인 동포들은 아직까지 개고기를 귀한 음식으로 즐긴다. 그래서인지 스타니슬라브씨는 우리 일행에게 혹시 개고기를 먹느냐고 물었다. 술 한 잔 하자는 것으로 보였지만, 여건상 응하질 못했다). 그는 북한식 사투리의 한국어를 구사했지만, 본격적인 인터뷰는 우즈벡어 통역으로 진행했다.

황만금을 인터넷 검색해보면 인물정보란에 ‘해외 한인 정치가’이자 ‘민족지도자’로 소개되고 있다. 황만금, 그가 누구이기에 우즈베키스탄 국가차원에서도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을까? 고려인 동포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50여 년 전이다. 우리 동포들은 거기서 꿈을 이루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먹고살기 위해 동물의 대이동처럼 조국을 떠나 만주와 연해주로 떠났으리라. 하지만 그곳에서도 식민지였던 조국을 위해 항일 독립운동을 해야 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약소국민의 설움이었을 것이다.

불행은 계속됐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고려인 20여만 명이 모든 꿈과 성과를 저버린 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됐다. 아니, 벼랑 끝에 떠밀려 죽음의 계곡에 버려진 짐승 취급을 받았다. 황만금도 이때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됐다. 불행하게도 조국은 이때 식민지가 되어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 동포들은 온갖 고난과 역경을 민족 특유의 근면성과 인내심으로 극복해 나갔다. 척박한 중앙아시아에서 쌀과 면화를 경작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다른 민족들에 비해 높은 생산력을 선보여 놀라게 했다. 중앙아시아, 특히 우즈베키스탄인들이 지금까지도 고려인들에 대해, 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까지 존경과 우호의 감정을 갖고 있는 이유다.

# 소련 최고의 집단농장 ‘폴리타젤’

스타니슬라브에 따르면 김병화 집단농장은 황만금이 일궈낸 폴리타젤에 비해 시설 수준이 1/3밖에 안 된다. 개인으로는 김병화가 유명하지만, 집단농장으로는 폴리타젤이 단연 최고였다고 자부했다. 당시 소련 최고의 집단농장이었음을 반증하듯 폴리타젤은 사회주의 공산 국가 지도자들은 물론 서방의 지도자들까지 대거 방문하는 등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최대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우즈벡 수도 타슈켄트 대표적 고려인 집단 농장

주민 2만 2000여명 가운데 5000명이 카레예츠

황만금 최고의 모범농장 만들어 ‘사회노동영웅’

정치적 탄압 고난 이겨내고 인생 말년 명예회복

폴리타젤은 당시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에 있는 대표적인 고려인 집단 농장이었다. 1925년 치르치크 강변 2700ha에 설립됐고, 2만 2000명의 주민 가운데 5000명이 고려 사람이었다. 주요 생산물은 목화, 옥수수, 과일, 채소 등으로 1953년 고려인 황만금이 농장장으로 있을 당시 구(舊) 소련에서 가장 많은 생산량을 수확했다. 김병화 집단농장과 함께 구 소련의 고위층들이 가장 많이 찾았던 곳이다. 당시 우즈베키스탄에는 고려인이 농장장으로 운영하는 콜호스가 15개 정도 있었다. 폴리타젤은 농업집단화에 기여한 트랙터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노르웨이 수상 “당신들의 체재로 전환…”

스타니슬라브는 “아버지는 30여 년 동안 폴리타젤이라는 집단농장을 경영하면서 탁월한 지도력으로 작은 농장을 소련 최고의 집단농장으로 발전시켰다”면서 “농장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흐루시초프와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도 농장을 방문했고, 베트남의 호찌만 주석과 노르웨이의 브라텔리 수상 등 국내외 지도자들이 왔었다”고 밝혔다.

이중 서방에서도 잘산다는 노르웨이 수상 일행은 하루 종일 콜호즈의 시설들을 둘러보았다고 했다. 이때 황만금이 노르웨이 수상에게 어떻게 봤느냐고 물으니, 총리가 답하길 “만약 소련의 모든 콜호즈가 여러분들처럼 운영한다면 우리도 당신들의 체재로 전환하겠다”말했다는 것. 황만금은 폴리타젤을 소련 최고의 모범농장으로 만들어 ‘사회노동영웅’이라고 불렸다. 레닌 훈장과 10월 혁명 훈장까지 받았다.

황만금은 1947년에 ‘레닌의 길’이라고 불리던 집단농장의 지도자가 되었다. 1951년~1953년에는 타슈켄트 인근의 치르치크(Chirchiq) 집단농장의 농업담당 책임자였다. 여러 집단농장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한 결과, 1953년에는 파산 직전이었던 폴리타젤 집단농장의 지도자로 선임됐다. 이 때 집단농장의 운영 방식을 혁신적으로 바꾸었는데, 그에 따른 농업 생산성은 경이로운 결과로 나타났다.

스타니슬라브가 전한 6m짜리 옥수수 사건은 취재진도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였다. 황만금이 알마티 회의에서 6m짜리 옥수수 이야기를 꺼냈다가 거짓말이라는 야유와 항의를 받고, 급히 옥수수를 수송해다가 확인해주었다는 일화였다. 폴리타젤 집단농장은 3년 만에 완벽히 변화했다. 농업 생산성은 타슈켄트주(州)에서 선두를 차지했다. 황만금은 1957년 1월에 소련 최고 상임위원회의 명령으로 ‘사회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폴리타젤 집단농장의 구성원 가운데 10명도 훈장과 메달을 받았다.

폴리타젤에서는 문화 분야 외에 축구, 육상, 역도, 여자(잔디)하키 등 국가의 체육 분야에도 지원을 아까지 않았다. 콜호즈의 경제적 역량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 폴리타젤 집단농장에는 1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문화회관과 함께 2곳의 경기장이 있었다. 그 외에도 백화점, 병원, 학교 등의 시설까지 자체적으로 갖췄다.

# 황만금, 면화 스캔들로 정치 탄압 받기도

1985년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으로 집권하면서 개혁 조처인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했다. 당시 집권층은 소비에트 경제 전반의 침체 원인을 정치적인 측면에서 찾았다. 부유한 자들이 부정부패로 개인의 재산을 축적, 국가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했다는 것. 이 같은 시각 때문에 우즈베키스탄 지도층도 ‘면화 스캔들’이라는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당시 최고회의 의원이었던 황만금도 정치탄압의 희생양이 되었다. 하지만 재판이 진행되면서 무죄임이 밝혀졌으나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1989년, 황만금은 감옥에서 풀려나 폴리타젤 집단농장의 명예회장을 맡아 여생을 보냈다. 1991년에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자, 정치적인 명예를 온전히 되찾았다. 1997년에 세상을 떠났다.

#탄생 100주년 기념 ‘박물관’건립 기대

스타니슬라브는 아버지 황만금에 대해 “제대로 교육을 받으신 분이고, 경제 분야에 해박한 지식이 있으신 분”이라면서 “자신은 물론 자녀와 직원들에게도 매우 엄격한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 대해 묻자 “우즈벡 국가 차원과 고려인문화협회 등에서 오는 12월 중에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물관이나 기념관 건립 등에 대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아카이브를 만들 준비위원회가 있고, 곧 시행령이 나오면 아버지 이름으로 박물관이 생길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속적인 운영(재정) 문제에 대한 세심한 고민을 덧붙였다.

고려인 황스타니슬라브는 구 소련시절과 독립 이후의 삶에 대해 묻자 “세계는 항상 변해가고 있고, 독립 전후의 삶엔 장단점이 있다”면서 “소련 시절엔 고려인들이 존경받는 민족이었다. 고려인들은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했기 때문에 노동영웅도 많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지금도 한인들이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존경받고 있기 때문에 매우 자랑스럽다”는 그에게서 고국에 대한 자부심과 아련한 그리움이 느껴졌다.<본지 발행인 iyongin@nate.com>

※참고자료:

황만금(올림포스와 골고다를 넘어서) (김 부르트‧김미하일 지음, 한울 아카데미)

황만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폴리타젤 집단농장 [Politodel Kolkhoz]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