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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이 만난 사람

도자기 빙열(氷裂)에 우주를 새기다… 비움과 채움의 미학

달항아리에 새생명, 오관진 화백

 

용인신문 | 화폭 위에 달항아리가 숨을 쉰다. 매끈한 백색 표면 대신, 가마의 뜨거운 열기를 견디고 나와 찬 공기와 부딪히며 만들어낸 수많은 틈, ‘빙열(氷裂)’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오관진 작가는 달항아리에 최초로 빙열을 그려 넣으며 전통 도자기를 현대 미술의 언어로 재해석한 선구자다.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화면 위에 세밀하게 그려진 수많은 빙열들이 마치 실제 도자기의 표면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러나 오관진의 작업은 단순한 묘사를 넘어선다. 그는 빙열이 지닌 철학적 의미, 시간의 흔적, 자연의 섭리를 달항아리 위에 담아내며 오랜 세월을 견뎌온 도자기의 생애를 회화 속에 구현한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도자기는 비움과 채움의 미학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예술적 성찰의 결과물이다.

 

 

■ 자연에서 흙으로, 그리고 달항아리로의 여정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오 작가의 초기 작업은 자연과 환경에 맞닿아 있었다. 어린 시절 조부의 고향이었던 대전의 훼손되지 않은 자연이 엑스포 개발과 함께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목도한 충격은 그를 생태 환경 작업으로 이끌었다. 자연의 풍요로움을 극사실주의로, 때로는 부감법을 통한 반추상의 형태로 표현하던 그는 2000년대에 들어서며 종이죽을 이용한 작업과 토기, 그리고 도자기로 시선을 옮겼다. 계원예고 시절 동양화를 전공하면서도 물레를 차며 도자기를 직접 빚었던 손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평면 위로 소환된 것이다.

 

 

 

 

 

■ 최초의 ‘빙열’ 화가, 무아지경(無我之境)의 경지

유수의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도자기를 관찰하던 그가 달항아리의 형태 그 자체보다 묵직하게 주목한 것은 도자기의 표면에 훈장처럼 남겨진 ‘빙열’이었다. 고열을 견디고 나와 수축하며 생기는 미세한 균열 속에서 그는 도자기가 품은 인고의 서사를 보았다.

 

초기에는 달항아리의 갈라진 틈 하나하나를 완벽히 재현하려 애썼다. "극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서 손에 마비가 올 정도의 통증을 겪기도 했죠." 그러던 어느 날, 마음을 비우고 붓을 내맡기는 ‘무아지경’을 경험하게 된다. 스스로를 의식하지 못한 채 물 흐르듯 선을 그어 내려간 그 순간부터 통증은 사라졌고, 화면에는 작가만의 고유한 우주가 맺히기 시작했다. 미술계에서 이른바 ‘오관진 빙열’이라 불리는 새로운 장르가 태동한 것이다. 이러한 오관진의 독창적 시도는 수많은 후배 작가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 도자기 빙열이 미술계에 굳건히 자리 잡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 칼끝으로 파낸 극사실주의, 입체와 평면의 경계를 허물다

그의 기법은 전통적인 붓질에만 머물지 않는다. 서양의 명암법과 동양의 공기원근법을 혼용하며, 두꺼운 오합 장지 위에 예리한 칼로 형태를 파내고 오려 붙이는 상감 기법을 회화에 도입했다. "달항아리의 명료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칼을 쓴다"는 그의 작업은 회화이면서 동시에 고된 조각이자 공예의 과정과 닮아 있다.

 

재료에 대한 탐구도 집요하다. 수지구 광교산 자락에서 직접 채취해 수년간 정제한 고운 황토를 아교와 섞어 도자기의 환원된 붉은빛을 묘사하는가 하면, 실제 나무를 짜 맞춰 탁자를 만들고 그 위에 금장 장식이나 쇳조각을 덧대어 철저한 입체감을 부여한다. 두 개의 사발을 위아래로 이어 붙여 만들 수밖에 없었던 조선시대 대호(大壺) 특유의 이음새 형태와 불에 그을린 시간의 때마저 고스란히 캔버스 위로 건져 올린다.

 

 

 

 

■ ‘비움과 채움’, 그리고 캔버스 뒷면에 적힌 ‘늘 감사해요’

오관진의 달항아리 위에는 종종 체리, 사과, 매화 같은 자연물이 허공에 둥둥 떠 있다. 이 초현실적인 화면 구성은 관람객에게 짙은 사유의 공간을 열어준다. 달항아리는 빈 그릇이다. 작가는 허공에 띄워진 오브제를 통해 관람객 스스로가 이 항아리를 ‘비울 것인지, 채울 것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과거 뉴욕 초대전 퍼포먼스에서 보여준 비움과 채움의 개념적 실현 역시 단순한 회화를 넘어 공간과 오브제를 활용해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의 예술적 깊이를 방증한다.

 

이 철학은 작가의 삶과 궤를 같이한다. “인간도 어머니 뱃속에서 텅 빈 채로 나와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씀씀이가 달라진다”는 그는, 욕심으로 채우려다 넘쳐 사달이 나는 것을 경계하며 스스로 ‘비움’을 실천하고 있다. 귀하게 얻은 첫 아이에 대한 감사함으로 시작한 유니세프 기부는 30년을 넘겼고, 작품 판매 수익의 일부는 암 환자와 독거노인, 미술을 꿈꾸는 소외된 학생들을 위해 내어놓는다. 그의 모든 작품 뒷면에는 예외 없이 ‘늘 감사해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긍정과 적극성, 그리고 창조성을 바탕으로 한 감사의 기도가 캔버스 이면에 흐르고 있는 셈이다.

 

■ 세계가 매료된 조선의 미학, 끝나지 않는 여정

오관진의 달항아리는 국경을 넘어 세계인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 2020년부터 이어진 인연으로 뉴욕 맨해튼에 있는 두 곳의 갤러리와 지속적인 초대전으로 이어졌고, 출품작 대부분이 완판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마이애미, 파리, 일본 등지에서도 연이어 러브콜을 받고 있다. 서양의 부호와 컬렉터들조차 그의 작품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동양의 고요한 우주와 성찰의 시간을 경험한다. 한국적인 소재가 세계 무대에서 어떻게 현대미술의 보편적 언어로 소통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다.

 

최근 작가는 일본 오사카 동양도자박물관을 찾아, 과거 도둑에 의해 300조각으로 부서졌다가 눈물겨운 수리 과정을 거쳐 복원된 달항아리를 세밀하게 카메라에 담아왔다. 깨진 파편들을 기어코 다시 이어 붙인 그 치열한 상흔을 화폭에 재현해 낼 다음 작업은 그 자체로 또 다른 경이로움을 예고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끊임없는 비움과 채움의 연속이니까요.”

 

도자기의 차가운 빙열 속에 뜨거운 삶의 온도와 광활한 우주를 새겨 넣는 화가.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철학을 직조해 내는 오관진 화백의 붓끝은 앞으로도 멈추지 않고 묵묵히 그 숭고한 여정을 이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