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8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진영논리, 자칭 보수와 자칭 진보

 

진영 논리, 자칭 보수와 자칭 진보

 

김민철(자유기고가)

 


한국정치 위기의 본질은 진영 논리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로는 민생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고 우기면서 온갖 논리를 늘어놓지만 정작 정치철학이 실종되었다.

 

박근혜-이명박 전임 정권의 몰락을 가리켜 보수의 침몰이라고 한다. 한국 보수의 절체절명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영남 패권과 친미, 반북 이데올로기에 의지해 권력을 유지하면서 보수주의로 포장한 구여권의 쇠락을 보수주의의 위기라 말한다면 틀렸다. 1987년 체제 이후 집권한 정권의 면면을 보면 보수정권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정부는 김영삼, 김대중 양김이 이끈 신한국당과 새천년민주당 정권을 꼽을 수 있다.

 

김영삼 정권은 3당 합당으로 영남패권주의를 뿌리내리는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금융실명제 등 개혁의 청사진을 갖고 집권했고 이를 실천했다. 김대중 정권은 영남 패권의 반작용을 이용해 호남-충청연합이라는 변칙적인 정치공학으로 집권했지만 자유와 민주, 시장경제에 충실했던 보수주의 정권이었다.

 

지역적으로 영남의 지지를 받는 데는 실패했지만 전임 정부에 비해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에 보다 충실했던 정권이었다. 이어 들어선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본질은 보수주의 정권이다. 관념적 수준에 머물렀지만 경제 사회적 약자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에서는 진보적 자유주의가 더해졌다. 노무현 정권부터 영남과 호남을 기반으로 한국정치를 양분해온 양김으로 대표되는 두 보수주의 정권은 색깔이 애매모호해졌다. 자유주의가 부쩍 강화된 보수정권이었던 노무현 정부는 대북 화해 정책의 추진과 함께 일방적인 친미사대주의를 거부함으로써 진보적 색깔이 더해졌다. 이후 한국정치는 이상한 도그마에 빠졌다. 친미 반북을 지향하면 보수주의고 북한에 우호적이고 미국에 비판적이면 진보주의로 치부하는 양분법적 공식이 성립되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영남 패권과 반북 친미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보수주의 철학은 실종되었고 실용주의라는 이상한 논리와 박정희 향수에 기반한 영남 지역패권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김영삼-김대중이라는 걸출한 정치가에 의해 제 모습을 갖추어 가다 이상하게 변질되었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형식적)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던 양김의 시대는 분명 한국의 보수정치가 군사독재체제를 종식시키고 진일보한 시기였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노무현 정부는 본질은 보수정권인데 자칭 진보라고 우겼다. 굳이 성격을 규정한다면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모르고 거기에 편승하여 자본이 권력을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 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허용한 자유주의적 정권이었다고 정의 할 수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보수주의라 부르기 민망한 철학이 부재한 패거리 정치세력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대책 없는 시장만능주의를 보수라고 착각했다. 박근혜 정권은 시계를 거꾸로 돌려 국가와 집권자를 동일시했던 박정희 시대의 복원이야말로 보수주의라 굳게 믿었다.

 

보수주의의 원조는 영국의 보수당이다. 에드먼드 버크(1729~1797)는 최초의 근대적 보수주의자로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당시 영국정치를 이끌었던 토리당-휘그당 양당체제에서 휘그당 소속이었다. 토리당은 국왕과 귀족의 이익을 위한 정치 결사체였고 휘그당은 신흥 부르조아지의 이익을 대변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전면에 등장하기 전인 20여 년 동안 유럽을 휩쓴 혁명의 여파는 귀족과 자본가의 나라 영국에 엄청난 위협이었다.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이 영국에 번지는 것을 우려했고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프랑스 혁명의 기본철학은 자유와 평등이었다. 여기에 연대가 더해져 기존의 질서를 타도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이념을 내세운 프랑스 대혁명은 신흥 지배계급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브르조아지와 지식인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유럽의 기존 질서,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과 온건한 방법으로 브르조아지의 지배질서를 확대하려던 세력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대혁명에서 표출된 혁신적 변화와 (당시로서는)급진적 경제개혁을 거부했다. 버크는 이상적인 혁명은 영국의 명예혁명과 미국의 독립혁명이라고 믿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 및 이에 관한 런던시민단체의 움직임에 대한 고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and on the Proceedings in certain societies in London Relative to it. 1790년 발표)이라는 논문에서 프랑스대혁명의 유토피아적 자유주의가 불러올 혼란과 파괴를 경고했다. 에드먼드 버크는 고대 그리스의 직접시민민주주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독재라고 규정하고 신분과 관계없이 도덕적 품성과 능력, 지식을 갖춘 사람이 대표성을 갖는 새로운 공화주의를 주창했다. 그는 복지에 대해서도 견해를 피력했다. 빈곤을 극복하려는 개인의 의지와 노력을 제약하는 직접적인 국가에 의한 복지정책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귀족과 부자(신흥 브르조아지)의 도덕적 고결함에 기초한 자발적 복지를 주장했다.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대혁명을 계급혁명이라고 간파했고 그의 직관은 옳았다. 프랑스 대혁명은 시민계급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세력을 배양해냈다. 대혁명 이후 필연적으로 다양한 이해를 가진 개인과 집단이 정치세력의 주체가 되기 위해 투쟁하고 분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는 마침내 카를 마르크스’(1818~1883)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hegemony)를 주장하며 공산당 선언’(1847)자본론’(1867)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은 노동자계급의 각성과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신지식인의 정치투쟁의 토양이 되었고 유럽을 시작으로 세계적인 혁명의 시대가 도래 했다.

 

근대진보주의의 시초는 누가 뭐래도 카를 마르크스이다. 그의 사상으로 인해 수많은 혁명가가 배출되었고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도아래 볼세비키가 러시아 혁명(1917.10.25.)에 성공하게 된다. 레닌의 직접적인 프롤레타리아트 혁명노선에 반대했던 율리 마르토프’(1873~1923)가 이끄는 멘세비키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1850~1932)이 이끄는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분화과정을 거쳐 현대 유럽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보수주의의 역사는 기존질서의 유지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독교적 가치관과 자유적 시장경제의 유지와 반 계급투쟁이 보수주의의 기본이념이다. ‘파시즘이라는 기형적인 극우 국가주의와 극단적인 독재의 행태를 보이기도 했지만 보수주의는 자본주의를 기본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으며 엘리트에 의한 입헌 민주정과 공화정을 지향한다.

 

진보주의의 역사는 시대적 상황과 배경에 따라 다르다. 에드먼드 버크가 보수주의를 정립하기 이전의 영국의 정치는 토리당이 보수고 휘그당이 진보였다. 카를 마르크스가 새로운 정치투쟁의 시대를 연 19세기 후반과 20세기의 영국정치는 자유당에서 노동당으로 진보주의가 변화하는 과정이었다. 1948클리블랜드 애틀리가 영국의 복지제도를 구축한 이후 노동당이 진보세력의 핵심 주류가 되었다. 영국공산당이 있지만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

 

유럽 진보주의의 또 다른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은 그 위세가 형편없이 쪼그라들었지만 프랑스사회당과 독일사회민주당이 진보진영의 핵심축이다.

 

앙겔라 메르켈이 이끄는 기독교민주당, 기독교사회연합으로 대표되는 독일의 보수주의 정치세력은 필요에 따라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과감하게 수용하며 폭넓은 연립정권을 유지 발전시켜왔다. 독일의 보수주의는 유연하고 도덕적 책임감과 능력이 뛰어나다. 프랑스의 경우는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중대한 위기에 처했다. 2016레퓌블리크 앙 마르슈’(전진하는 공화국)라는 신생정당을 창당하여 25대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된 마크 롱사회자유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의 이념을 내세워 중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마크 롱의 등장으로 프랑스 보수주의를 대표했던 공화당과 진보주의를 선도했던 사회당은 몰락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 유럽의 정치-사회학자들은 마크 롱의 출현을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진화라고 경계한다. ‘마가레트 대처존 메이저가 이끄는 영국 보수당 16년 집권은 신자유주의의 절정기였다.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은 엄혹했다. 다수의 노동자계급이 거리로 내몰렸고 중산층은 불안해졌다. 급격한 민영화와 복지축소로 신자유주의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자 자본은 토니 블레어라는 노동당 정치인을 주목한다. ‘앤서니 기든스3의 길을 새로운 이념으로 삼아 노동당의 급격한 우경화를 모색하고 토니 블레어를 간판으로 신자유주의의 화장 바꾸기에 성공했다. 토니 블레어의 배후에는 금융제국 로스차일드가문과 언론제국 루퍼드 머독이 있었다. 토니 블레어-고든 브라운 노동당 정권에서 2008년 세계경제를 나락에 빠트린 금융위기가 터졌다. 금융위기로 정권은 보수당으로 넘어갔고 노동당은 야당이 되었다.

 

미국의 보수주의는 철저하게 프로테스탄트와 복합자본(석유-에너지, 항공군수산업, 월가의 금융산업, 지식정보산업)에 기반하고 있으며 표면적으로는 백인의 지배권 유지를 내세우고 있다. 한국의 자칭 보수주의 정권이 철저하게 남북대결에 기초한 안보 최우선주의와 영남이라는 지역적 기득권을 권력유지의 핵심수단으로 삼아왔듯이 미국의 보수주의는 대 테러 전쟁과 백인 우월주의를 권력유지의 명분으로 삼아왔다. 미국의 진보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소수인종과 성소수자의 권리인정을 내세우고 있으며 민주당이 핵심정치세력이다. 백인 지식인, 경제적 약자, 소수인종, 문화예술가, IT산업종사자 등의 지지를 받고 있다. 미국의 진보주의는 유럽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1931년 발족해 1976년 해체된 비미위원회’(미국의 국가이익 수호에 비판적인 인사를 색출하고 징계하기 위해 의회에 설치되었던 기구)의 활동으로 미국의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세력은 일소되었다. 특히 매카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1950년대 냉전과 맞물리면서 카를 마르크스주의는 발본색원’(拔本塞源) 되었다. 미국의 진보주의는 자유주의의 또 다른 이름으로 전락했다. 공화당이 집권하나 민주당이 집권하나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미국을 움직이는 핵심세력은 자본과 정치, 군부와 관료의 복합 카르텔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이후 미국에서 정치가 자본과 시장을 부분적이나마 통제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다름없다.

 

불행하게도 한국민주주의는 유럽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배우지 않고 미국의 철저한 자본주의를 민주주의와 동일시하여 왔다. 자본의 민주화가 생략된 민주주의는 자본의 독재체제이다. 경제적 민주화, 사회-문화적 민주화가 없는 정치민주화는 선거일만 국민주권이 인정되는 알맹이 빠진 형식적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이삼년이 못가 정당의 간판이 바뀌고 어느 줄에 서야 정치생명이 유지될까를 고민하는 것이 전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 한국정치에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원론적 개념을 논한다는 것이 서글프다. 굳이 따지자면 한국의 진보주의 정치세력은 정의당이 유일하다. 더불어 민주당은 자유주의적 보수정당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국민의 당(통합파와 반 통합파를 막론하고)은 새로운 노선을 내세우고 있지만 여전히 지역기반과 정치적 이해득실에 매몰되어 있다. 자유한국당은 논평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하다.

 

한국의 제 정치세력은 지금부터라도 진정한 보수주의, 자유주의, 진보주의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자신에게 맞는 옷을 맞춰 입고 국민의 지지를 구해야 한다. 사족을 더한다면 정치인들이 제발 공부 좀 했으면 더 바랄게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