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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물

역사 바로세우기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오룡의 역사 타파(30)

   

고단했던 시대의 상징물인 경천사지 10층 석탑의 수난

요란했던 역사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일제의 조선 식민 지배의 상징물인 총독부 건물이 폭파됐다. 당시 이 건물은 국립 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995년 김영삼 정부는 졸속 전시 행정의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과거역사의 청산을 주장하며 중앙박물관을 없애 버렸다. 10년의 공사끝에야 현재의 용산 중앙 박물관으로 이전했지만 박물관 설계에서도 논란이 발생했다.

원래 설계 지침은 박물관 중앙의 메인로비 한가운데 경천사지 10층석탑을 전시하도록 했다. 역사바로세우기가 진행된 가장 큰 이유였던 식민청산 이었는데, 원 간섭기의 상징과도 같은 경천사지 10층석탑을 중앙에 전시한다는 이유였다. 결국 탑은 중앙로비에서 동관으로 옮겨졌다.

수려한 조형미와 이국적 풍모를 지니고 있는 탑의 원래 위치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중련리(개풍군 광수리, 현재 개성시 부소산기슭)의 경천사지에 세워져 있었다. 이 석탑의 기구한 운명은 조선의 쇠퇴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1907년 조선을 방문한 일본의 궁내성 대신 다나카 미츠야키가 이 탑을 탐내었다.

1909년 조선에 대사로 온 다나카는 “고종이 경천사탑을 자기에게 하사하였다”는 터구니 없는 거짓말로 사람을 속인 후 도쿄에 있는 자기 집으로 불법 반출하였다. 이후 미국인 헐버트 등의 노력과 국내외 여론이 안좋아지자, 그는 1918년에 반환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탑은 원래 위치로 돌아 가지도 못하고 40년동안 해체된 상태로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었다.

1960년에 이르러 경복궁에 복원되었으나 산성비와 풍화작용에 의한 보존상의 문제점이 드러나 1995년 해체되었다가 현재의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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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세계제국을 건설한 원에 의해 80여년간의 지배를 받았던 고려의 문화와 풍습은 엄청나게 변했다. 몽골말과 글이 지배층의 상용어가 됐고 변발과 호복이 유행했다. 건축계 역시 새로운 변화를 겪었다. 원의 건축 유형들이 유입되어 다포형식의 건축물이 보편화된 것이다.

탑의 1층 몸돌에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탑의 건립 이유는 원나라의 황제와 고려왕실의 수복(壽福)을 기원하며 천기가 순조롭고 국태민안하며 불법이 더욱 빛나고 법륜이 항상 움직여 수복을 얻고 다 같이 불도를 이루기를 기원한다'는 것이다.

탑의 조성을 주도한 이는 강융과 고룡봉이다. 미천한 출신인 강융은 몽골에 부역하여 출세가도를 달렸고 자신의 딸을 원의 승상인 탈탈에게 첩으로 주어 부원군의 직위까지 올랐다. 고룡봉은 원황실의 내시가 되어 고려에 내정간섭으로 악명이 높았던 자였다..

개경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조성된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물인 조선총독부와 비슷한 원간섭기의 상징적인 건축물인 것이다. 비록 조성배경이 반민족적이더라도 이탑의 예술적가치는 떨어지지 않는다.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것은 과거의 흔적을 지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치욕을 보듬어 안고 그 상처를 승화하여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교훈을 새기는 것,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룡(평생학습 교육연구소 소장, 오룡 아카데미 원장, 용인 여성회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