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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제3의 처인성을 찾아라”
인터뷰 - 산성전문가 심광주

기획처인성의 실체를 찾아서 ③

용인신문은 그동안 처인성의 실제 위치 논란을 다양하게 보도해 왔다. 하지만 용인시 행정당국 뿐만 아니라 지역내 향토사학계 관계자들조차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본지는 현재까지 알려진 역사자료를 토대로 처인성의 실제 위치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본지는 그동안 ‘평양역사박물관’에 있는 <처인승첩도>와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각종 고지도, 그리고『한국지명총람』에 나타난 처인성 위치 기록 등을 단독 보도 해왔다.

이를 특종 보도해온 박숙현 선임기자는 현재 ‘이사주당 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고, 희곡 『처인성』과 청소년을 위한 역사만화 『처인성의 위대한 전투』의 작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 기획을 통해서는 본지 872호 1면에 단독 보도했던 <처인성 실제 위치 다시 찾아야> 제하의 기사를 후속 보도하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자료만을 가지고는 고려시대의 역사 현장을 밝히기는 쉽지 않다. 전문가들과 독자여러분들의 다양한 제보를 기다린다.     <편집자 주>

현재의 처인성은 군사·지정학적으로는 가능성 희박
용인에서는 석성산성 같은 제3의 ‘전투성’이 유력

 

   
▲ 심광주 산성 전문가 (토지주택박물관 부장·경기도문화재 위원)
현재의 처인성은 군사 · 지정학적으로 몽골군을 맞아 싸운 처인성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산성전문가의 주장이 제기됐다.

 

그는 또 본지에서 추정한 십자봉 부근 역시 진짜 처인성일 경우 육안으로 성(城)의 흔적이 확인돼야 하지만, 조사 가치는 충분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특히 “제3의 처인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덧붙였다. 즉 남사면의 기존 처인성은 실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 부장(경기도문화재위원)은 “몽골군을 맞아 싸웠던 고려성의 일반적인 특징은 해발고도 300~500m에 이르는 산간오지의 산성으로서 전투성보다는 도망가는 피난성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말했다.

즉, 전투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몽골군이 쉽게 침입할 수 없는 가파른 성이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적의 접근이 어렵고 소수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막아낼 뿐만 아니라 피난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몽골의 침입 때 피난성으로 이용했던 양평의 함왕성(해발 740m)과 가평의 운악산성(해발 935.5m)이 대표적인 예다. 현재의 처인성 인근에서는 석성산성이 가장 유사하다.

심광주 부장은 “당시 전투상황이나 몽골군 이동 경로를 검토해야 하지만 평지성에서 적을 맞이했다는 게 납득이 안 간다”는 입장이다. 실제 당시 몽골군은 숫자가 많고 무기나 기동성 등에서 뛰어나 평지의 작은 성에서 방어하고 견제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는 또 “현재의 처인성은 일반적인 패턴과도 다르며 몽골군에 대항하던 백성들이 자살특공대가 아닌 이상 피난성으로 이용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특히 충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윤후가 지휘한 점을 고려한다면, 이 같은 작은 성으로 주민을 이끌고 피난했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처인성은 성벽 부분을 제외하고, 내부 면적을 계산해 볼 때 1인당 필요 활동 면적이 턱없이 부족, 전투를 하거나 피난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밖에도 국방군사연구소가 펴낸 『한민족전쟁통사』고려시대편에 의하면 “몽고의 2차 침입시인 1232년 8월 몽고의 태종은 살리타이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기병 1만여기 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고려 침공을 재개하게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10월 처인성 전투에 대해서는 “살리타이가 500여기의 병력을 이끌고 처인성을 침투도중 5~6기의 병력만을 거느리고 동태를 살피다가 매복병에 의해 사살됐다”고 했다.

이글은 현재의 처인성을 실제 처인성으로 인정한 가운데 쓴 글이기 때문에 다소 허구적인 부분이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500기의 병력을 이끌고 침투했다고 기록해 적지 않은 병력이 처인성에 침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심 부장은 “현재의 처인성은 통일신라시대의 반원형 평지성으로 8~9세기의 일반적 형태를 보인다”며 “조세나 세금 관리를 위해 만든 성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1998년 ‘고려시대의 용인’이라는 제하의 학술대회에서 심정보 교수 역시 차용걸 교수 토론자로 나와 처인성을 평지에 가까운 구릉성이라며, 축조시기를 통일신라시대로 보았다. 심교수는 “이런 구릉성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는 효과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당시의 치소로 이해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처인성 취재를 통해 주목할 만한 것은 제3의 위치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용인지역에서 제3의 처인성을 찾는다면 석성산성(석성산)이 피난성의 역할을 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 심부장의 설명이다. 현재의 남사면 지역에서는 병사들이 매복해 있다가 살리타이를 사살했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

심정보 교수 역시 고려시대 용인 학술대회에서 “처인성보다는 험준한 산령에 석재로 구축한 석성산성이 상대적으로 적을 방어하기 용이한 전투용산성임을 알 수 있게 한다”고 지적한바 있다. 그는 또 “피난처는 석성산성이 될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김윤후가 살리타이를 사살할 당시의 처인성은 피난처보다는 처인부곡의 창고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이번 취재결과,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은 자료의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본지가 산성의 근거로 제시했던 대동여지도나 한국지명총람의 산성 표시 혹은 표기에 대한 자료의 오류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심 부장은 마지막으로 “현재로서는 학술대회가 의미 없다. 성의 흔적이나 기록이 새롭게 발견된 것이 없는 가운데 하면 기존 주장에서 별반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현재의 처인성을 둘러싼 지역들을 조사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본지가 제시했던 십자봉 부근도 산성의 흔적이 발견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조사해볼 가치가 있고, 제3의 처인성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다.
<선임기자 박숙현0175049116@naver.com>

<제언>
처인성 위치 비정, 학술적으로 규명해야

   
▲ 김장환 용인문화원 사무국장
최근 용인신문이 보도한 처인성 관련 연재 기사(872호~874호)에 따르면 처인성이 산성으로 명시된 자료가 발견되어 처인성에 대한 재조사가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이 용인 지명 탄생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처인성에 대한 종합적인 정비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가운데 제기된 사안이기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처인성 위치 비정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10여년 전에 현재의 처인성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고 향토사학계의 갑론을박의 지면 토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2004년에는 경기도박물관에서 용인 처인성의 성곽둘레가 300m에 불과해 당시 고려를 침략한 대규모 기마병력을 대적할만한 장소로 보기에 무리가 있다며 오히려 평택 진위면에 있는 봉남리 산성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물론 경기도박물관 측이 와전된 기사라 해명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끊임없이 제기되어 오고 있는 처인성 위치 비정의 문제를 단순한 개인의 주장이거나 일부의 학설이라 간과한다면 이는 용인시민으로서 무책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역사 앞에 커다란 우를 범할 수 있다고 본다.
처인성은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무능한 정부군을 대신하여 민중들이 분연히 일어나 동북아시아의 평원을 누비며 정복전쟁을 일으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했던 몽고군을 물리친 역사의 현장이다. 때문에 처인성은 대몽 승전지인 동시에 용인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자 정신문화의 구심점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인성의 정확한 위치가 어딘가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안이다.
본 문화원에서는 처인성을 통해 용인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문화상징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지난해부터 처인성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한몽국제학술대회를 비롯하여 처인성스토리텔링 공모전 등 각종 기획 사업을 운영하였으며 금년에는 이의 연속선상에서 처인성의 위치 비정에 관한 학술행사를 개최할 계획이다. 오는 2014년 용인 600주년을 앞두고 처인성 복원 및 종합정비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처인성의 위치를 정확히 규명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용인신문이 보도한 처인성 관련 연재 기사(872호~874호)에 따르면 처인성이 산성으로 명시된 자료가 발견되어 처인성에 대한 재조사가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이 용인 지명 탄생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처인성에 대한 종합적인 정비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가운데 제기된 사안이기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처인성 위치 비정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10여년 전에 현재의 처인성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고 향토사학계의 갑론을박의 지면 토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2004년에는 경기도박물관에서 용인 처인성의 성곽둘레가 300m에 불과해 당시 고려를 침략한 대규모 기마병력을 대적할만한 장소로 보기에 무리가 있다며 오히려 평택 진위면에 있는 봉남리 산성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물론 경기도박물관 측이 와전된 기사라 해명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끊임없이 제기되어 오고 있는 처인성 위치 비정의 문제를 단순한 개인의 주장이거나 일부의 학설이라 간과한다면 이는 용인시민으로서 무책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역사 앞에 커다란 우를 범할 수 있다고 본다. 처인성은 강화도에 피신해 있던 무능한 정부군을 대신하여 민중들이 분연히 일어나 동북아시아의 평원을 누비며 정복전쟁을 일으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했던 몽고군을 물리친 역사의 현장이다. 때문에 처인성은 대몽 승전지인 동시에 용인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자 정신문화의 구심점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인성의 정확한 위치가 어딘가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안이다. 본 문화원에서는 처인성을 통해 용인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문화상징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지난해부터 처인성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한몽국제학술대회를 비롯하여 처인성스토리텔링 공모전 등 각종 기획 사업을 운영하였으며 금년에는 이의 연속선상에서 처인성의 위치 비정에 관한 학술행사를 개최할 계획이다. 오는 2014년 용인 600주년을 앞두고 처인성 복원 및 종합정비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처인성의 위치를 정확히 규명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알립니다>
“석성산성(성산=석성산)은 보개산성과
같은 성(城)의 별칭입니다. ”
본지 874호 3면에 용인시가 2010년 발간한 ‘용인처인성 종합정비계획보고서’ 중 경기남부지역 관방유적 현황(지도)에 석성산성· 할미산성· 보개산성을 각각 3개의 별도 산성으로 표시한 지도의 오류를 지적한바 있습니다. 하지만 오류를 지적한 편집과정에서 사진설명과 상자기사에도 일부 혼돈이 있었음을 밝히며, 독자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본지는 각종 자료와 일부 학자들이 제각각 주장하고 있는 내용을 인용 전달하면서 할미산성과 보개산성은 같은 산성의 별칭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석성산성과 보개산성이 같은 산성의 별칭임을 재확인했습니다. 일부 학자들의 주장을 재인용하면서 설명이 반대로 되었던 것입니다.
고지도 인용부분도 일부 학자들의 잘못된 해석을 기자가 재인용하면서 혼란이 야기됐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오류로 판단됨)이 이미 오래전부터 향토사료 등에 수록, 용인시는 물론 학계에서조차 각종 자료사용시 여과 없이 인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지는 용인시가 이 같은 오류가 재발하지 않도록 빠른 시간 안에 수정보완 할 것을 촉구하며, 현재 기획취재로 보도중인 처인성 위치 논란 역시 더욱 심층적이고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보도할 것입니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