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인신문 | 고은 시인의 일기 『바람의 기록』에는 유신독재 막바지에 이르는 시대와 그 시대에 맞서 살아가는 한 특출난 시인의 삶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한 개인의 일기이면서도 ‘천백억 화신’, 민중의 삶과 원과 한이 들어있다, 특히 세계가 감동으로 읽고 최고로 인정해주는 시인이 돼가는 각고의 과정이 여실하게 들어있다.
“내일 부산-제주간 고급 연락선 카페리호의 시승(試乘)을 <한국문학사> 이근배가 청한다. 이호철 최인훈 최인호와 이근배가 동행이라 한다. 오랜만의 최인훈이 함께 한다니 가기로 했다. (중략)
한국일보 사주(社主) 장기영 61세로 급사했다. 드물게 문화적인 실업인(實業人)이다. 멋진 도둑놈이다. 박정희가 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바람의 기록』이 시작되는 1977년 4월 12일 일기 일부다. 그날그날 중요한 일과 장기영에 대한 인상적인 인물평도 덧붙이고 있다.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 비망록인 것이다. 그러면서 ‘박정희가 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토로하고 있다. 일기대로 다음 날 제주도에 갔다가 중앙정보부원한테 연행돼 서울로 끌려와 열흘 간 감금돼 심문받아야 했다.
“오후 병원 다녀서 YWCA 강연했다. 그 길로 미도파 거리의 시위, 시청 앞의 시위, 남대문 거리의 시위, 군중 속에 섞여 있었다. 페퍼포그 차가 불타는 광경, 밤의 데모, 최루탄 가스의 눈물과 콧물, 나는 비로소 시인인 것 같았다.
5월 15일 밤의 데모! 서울역 광장의 7만 대학생의 대집회! (중략) 신현확의 성명을 라디오로 들으며, 그놈의 새끼를 욕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밤참을 먹었다.”
1980년 5월 15일 일기 일부다. 그리고 이튿날인 16일 일기는 끝난다. 17일 신새벽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소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투옥당했기 때문이다. 광주5.18민주화운동 전야의 예비검속이었다.
박정희가 죽기를 바라고 시작된 일기가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 총탄에 죽고 대신 들어선 전두환 축출을 바라며 마감되고 있다. 그래서 『바람의 기록』은 군부독재에 목숨 내놓고 저항한 숨 가쁜 기록으로 읽힌다.
중앙정보부 2명과 경찰서 2명이 순번을 갈아 밤낮으로 따라다니고 감시해 일기를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언제 가택수색을 당할지 몰라 쓰자마자 일기책은 천장 서까래 안쪽 등 찾을 수 없는 곳에 감춰둘 수밖에 없었다.

『바람의 기록』은 2백 자 원고지로 무려 3600장 남짓, 보통 단행본으로 3권 정도나 되는데도 눈 뗄 수 없이 숨 가쁘게, 재미있게 읽힌다. 그날그날 중요한 일과 느낌 등을 짤막짤막 적어놓은 비망록, 일기인데도 박진감 넘친다.
왤까? 우리 삶과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인물들이 셀 수 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인물, 민중들과 얽히고설키며 박정희 유신독재 막바지를 숨 가쁘게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질풍노도 시대를 날것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날것! 그래, 인위적인 지성이나 반성, 좌고우면에 길들어지지 않은 날것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떠나왔던가. 그래, 교양인입네 하며 그런 것들에 강제당해 왔던가. 그러나 이 일기의 기록, 글자들은 즉물적이어서 쓰고 읽는 사람의 행위와 마음과 그대로 일치한다. 그래, 쫓기듯 질주하며 쓴 일기가 되레 심사숙고하며 쓴 그 어떤 글보다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우리네 삶과 역사의 그 싱싱한 맛과 깊이를 날것으로 돌려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뜨겁고 공포를 모르는 힘도 중요하나, 벌벌 떨고 약한 것도 수수하고 평범한 것도 소중한 줄 알아야 한다. 용기 없는 양심은 죄악이라고 한다. 옳다. 옳다. 그러나 이 세상의 많은 용기 없는 자가 설 자리를 죄악으로 규정하지 않는 큰 공간이 전제되어야 한다. 민중, 민중, 하고 나서 그 민중 위에 올라타서는 안 된다. 민중의 편에 서는 일은 석가 예수 되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다.”
민중들과 어우러지며 나온 실감을 그대로 적은 일기다. 배척하지 않고 따스하게 보듬는 민중주의라서 폭이 넓다. 민중을 부르짖으며 민중 위에 군림하려는 민중주의자들을 우린 또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명망과 출세를 위한 민중주의자가 되지 않으려 경계 또 경계하고 있는 대목들도 일기에는 많이 들어있다.
이렇듯 일기 어느 대목을 읽어도 고은 시인이라는 인간이 그대로 잘 드러나 있다. 반독재 투쟁가로, 통일 운동가로, 노동운동가로, 끊임없이 자신과 사회를 혁신하고자 하는 혁명가로, 좋은 이웃과 친구 그리고 선후배 동지로, ‘천백억의 화신’이 되어 밤낮없이 살아간 시인의 사실적 기록이기에. 때문에 『바람의 기록』은 막바지를 향해가는 독재 시대 민주화 운동사는 물론 당대 문화와 정신 보물창고로서의 사료적 가치도 크다.
1958년 등단해 지금까지 수만 편의 시와 소설과 산문 등을 써오고 있는 작품들을 쭉 읽어보면 고은 시인은 감격과 감동의 시인임이 드러난다. 삶과 시대, 세상에 감격하며 살아오고 있다. 그런 감격의 언어로 쓰인 시편들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직격해 들어온다. 그래서 독자들은 물론 우주 삼라만상 속내까지 감동으로 소통하게 해 세계 최고 시인 반열에 올랐다. 그런 시인이 독재에 온몸으로 맞서 쓴 『바람의 기록』 역시 감격과 감동으로 쓰이고 읽힌다.
새해로 등단 67년, 나이 92세가 되는 고은 시인은 여전히 바쁜 현역 시인이다. 지난해 심청을 모티프로 60여 년의 긴 세월을 익힌 대하 서사시 『청』을 펴냈다. 100 쪽 남짓의 요즘 시집에 비하면 10권이 훌쩍 넘는 1200쪽 가깝다. 그 방대한 분량에 우리네 삶과 역사는 물론 우주 삼라만상의 속내를 지금 여기 한순간의 감격으로 담아냈다. 심청 이야기 서사에 대한 기대와 판소리처럼 익숙한 운율로 지금 우리네 가없는 삶을 되돌아보며 눈뜨게 하는 시집이다.
“한(恨)과 흥(興)은 서로가 시절인연의 좌우이므로 몽땅 이 세상의 반려이다”라는 서문과 함께 시집 『세상의 시』 제1권도 펴냈다. 세상 구석구석 삼라만상과 감격으로 만나 날마다 찾아오는 시들과 감동하며 앞으로 몇십 몇백 권 쓰겠다며 등단 이전 순정한 문학청년으로 날로 더 젊어지고 있다. 도서출판 그냥 http://gny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