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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무장항일투쟁 ‘홍범도 장군’의 눈물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대한민국… 프랑스 ‘나치 청산의 교훈’
김민철(칼럼니스트)

홍범도 장군.

 

 

패탱

 

드골

 

육사, 교정에 설치된 홍 장군 흉상 철거 진행… 독립운동가 수모
항일투쟁 당시 미국과 연합군이던 소련과 손잡았다고 트집 잡아
‘반민족행위자’ 처단 실패… 프랑스 ‘나치 부역자 철퇴’와 대조

 

[용인신문] 2023년은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로 시끄러웠다. 8월 24일 오후 1시부터 오염수 방류가 시작되었다. 도쿄전력은 앞으로 30년간 단계적으로 오염수를 정화 처리하여 방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오염수를 정화 처리하여 매우 안전하며 마시거나 수영해도 인체에 피해가 없다‘고 주장했고, 한국 정부는 ’매일 안전성을 모니터링하여 국민에게 브리핑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가 남는다. 일본 정부는 먹어도 인체에 해가 없을 정도로 안전하면 농업용수로 사용하지, 무엇 때문에 자국 어민과 인접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다에 방류하는가? 그것도 일시에 방류하지 않고 30년간 단계적으로 방류하는 것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홍범도 장군 유해, 113년 만의 환국과 장군의 흉상을 둘러싼 논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2021년 8월 15일 카자흐스탄으로부터 고국 대한민국으로 봉환(奉還)되어 8월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장군이 이역만리 중앙아시아에서 서거한 지 78년, 1908년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항일투쟁의 무대를 옮긴 지 113년 만의 환국이었다. 홍범도 장군은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나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1895)이 일어나자 그해 강원도 회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다. 1907년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정미7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8도에서 1만여 명이 넘는 의병이 궐기했다. 홍범도 장군은 1907년 최고의 전과를 올렸다.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장군은 1908년 만주로 항일투쟁의 무대를 옮겼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주도한 장군은 간도참변(1920년 10월~1921년 4월) 이후 대한독립군 근거지를 연해주로 옮겼다. 장군은 볼셰비키 적군 파르티잔 고려인 독립여단을 맡아 러시아 적백내전에 참전했다. 러시아에서 1917년 10월 25일(율리우스력) 볼셰비키 혁명이 발발하자 미국, 프랑스, 영국, 일본 등 16개국 군대 25만 명이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내전에 개입했다. 일본은 3개 사단을 출병시켜 연해주에서 이르쿠츠크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했고 홍범도 장군은 일본 간섭군과 싸웠다.

 

얼마 전 홍범도 장군의 과거 전력을 문제 삼아 육사 교정에 있는 흉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논란이 벌어졌고 현재도 진행중이다. 장군의 흉상 철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비에트공산당 가입 전력을 문제 삼는다. 장군은 1927년 소비에트공산당에 가입했고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 항일 무장투쟁의 주력은 사회주의 계열이었다. 장군의 소비에트공산당 입당을 문제삼는 세력들은 대부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족주의 계열이 항일 무장투쟁에 미온적이었던 것이 문제이지, 사회주의 계열이 무장투쟁에 적극적이었던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저들이 끌어다 붙이는 논거가 하도 해괴하여 일일이 반박하기도 피곤하다.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절이면 일제의 식민 통치는 면죄부를 받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친일부역행위도 단죄할 수 없다. 소위 뉴라이트 계열이 줄기차게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주장하는 이유는 1905년 을사늑약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40년간 반민족행위를 벌인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다.

 

프랑스의 나치 청산

나치 독일은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전격적으로 프랑스를 침공했다. 프랑스군은 반격을 시도했으나 변변한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하고 수십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필리프 페탱은 스페인 대사였는데 급거 귀국하여 프랑스를 보전하자면 독일에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총리가 되었다. 1940년 6월 22일, 페탱 총리는 독일에 항복했고 형식적으로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프랑스 비시 정부의 탄생은 독일에 항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로써 1871년 나폴레옹 3세의 몰락으로 수립된 프랑스 제3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이어서 독일군이 점령한 파리를 중심으로 한 군정 지역을 제외한 프랑스 남부와 해외 식민지는 비시 정부의 관할이 되었다. 페탱 총리 내각에서 국방차관에 임명된 샤를 드골 소장은 항복에 반대하며 8월 5일 영국으로 탈출하여 ‘자유프랑스’ 망명정부를 세웠다. 드골은 페탱이 체결한 휴전협정은 무효라고 선언하고 나치독일에 맞서 레지스탕스 저항운동을 조직하고 지휘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주력은 공산당과 사회당이 주도했는데 제5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프랑수아 미테랑은 사회주의 계열 레지스탕스의 최고지도자였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좌파든 우파든 자유프랑스를 유일 합법정부로, 드골을 최고지도자로 인정했다. 프랑스에는 자유프랑스와 비시 정부 두 개의 정부가 4년간 병립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드골은 1944년 8월 25일 파리에 입성하여 폰 콜티츠 독일군 사령관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드골 임시 대통령, 좌우 거국내각 수립 나치 청산 작업

파리는 수복되었으나 전국이 완전히 탈환되지 않은 상태에서 드골은 임시대통령에 취임하여 좌우합작 거국내각을 수립하고 신속하게 나치 청산 작업에 들어갔다. 프랑스는 독일이 항복하기 이전에 이미 나치 청산에 들어가 비시 정부 관료와 군장교를 수천 명 체포했다. 드골은 나치 청산을 주도하면서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 반역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고 선언했다. 프랑스는 150만~200만 명의 나치 부역 혐의자를 대상으로 99만여 명을 조사하였다.

 

프랑스는 1944년 말에서 1945년 5월까지 약식 재판에서 9,675명이 나치 부역자로 처형되었다. 역사학자 로베로 아롱은 자신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3만에서 4만 명이 재판없이 처형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로베로 아롱의 주장이 구체적인 자료를 첨부한 것은 아니어서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처형된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의 나치 청산은 지식인과 언론인에 더 엄중한 잣대를 들이댔다. 언론인을 가장 먼저 정식 재판에 회부한 이유에 대해 드골 임시정부는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지식인과 작가는 사과를 받는 것으로는 안 되며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단죄했다. 비시 정권의 일간지 <오늘>의 정치부장 조르주 쉬아레즈가 맨 먼저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된 것을 시작으로 많은 언론인과 작가들이 단죄되었다. 프랑스 최대 일간지 <르 마텡>의 편집국장 로잔은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나치 청산의 하이라이트는 비시 정부의 수반 필리프 페탱에 대한 재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베르됭 전투의 영웅으로 육군 원수였던 페탱에게는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드골 임시 대통령은 당일로 사면권을 발동하여 페탱을 종신형으로 감형했고 그는 1951년 7월 23일 일드외 섬의 감옥에서 향년 9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비시 정권의 총리 피에르 라발은 총살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5000여 명의 비시 경찰이 체포되어 처벌받았다. 장교 1만 270명이 조사를 받고 650명 파면, 2570명이 전역 조치되었다. 지방공무원 5만여 명이 조사를 받았고 1만 6113명이 처벌되었다. 6766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이 중 782명이 처형되었다. 프랑스는 4년간 나치 치하의 부역자들을 이렇게 심판하고 청산했다. 반면 한국은 반민특위가 설치되어 활동을 개시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방해로 단 한 명도 처벌하지 못하고 1951년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이 폐지되었다. 그결과 홍범도 장군 같은 항일 무장투쟁의 상징적인 인물이 치욕을 당하는 나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