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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방·혐오 현수막… 소통은 태초부터 불가능했다

오룡(평생학습교육연구소 대표/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용인신문] 소통은 태초부터 불가능했다. 야훼의 말을 듣지 않은 인간의 고통은 창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명제다. 인간의 몸은 완벽한 소통이 불가능한 개별화된 존재다. 대체 불가한 고유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고유한 존재들이 만나는 세상에서의 언어는 ‘공통의 언어’를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바벨탑은 신에 의한 통제를 거부했던 자의적 인간들의 자발적 투쟁의 산물이다.

 

인류는 단 한 번도 공통어를 가져 본 적이 없다. 세계는 다양한 언어가 존재한다. 만약에 한가지 의미의 언어만 존재한다면 어떤 세상일까. 완벽한 지배를 생각하는 독재자는 ‘하나의 언어로만 소통’되는 세상을 꿈꿀 것이다.

 

독재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견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역사에 대해서도 단일한 사관을 강조하고, 각종 현안에 관한 국민들의 발언을 ‘개념 없다’, ‘선동이다’ 라며 냉소하며 차단하는 것은 독재적 사고의 발현이다.

 

원래 소통(疏通)의 소(疎)는 ‘통하다, 막힌 것이 트이다, 친하지 않다, 멀다’라는 양립의 뜻이 있다지만.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친하지 않은 것’의 관계를 넘어 ‘반국가적’으로 몰아간다면 자의적 인간의 자발적 저항을 불러올 수 있다. 동서고금의 모든 역사가 그렇게 흘러왔으니까. 만물 중에 같은 것은 없다. 우주는 차이를 인정하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되 관계적으로 긴밀하다. “코스모스라는 단어는 만물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내포한다.”라는 사실이다. 칼 세이건이 말한 대로 “코스모스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

 

결국, 다름을 거부하고 차이를 구분하는 것도 인간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차이가 다양성(막힌 것이 트이다)을 넘어 차별을 위해 나누어지는(친하지 않다) 사회는 ‘현재는 있으나 미래는 없다’라는 생각.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은 가능하다.

 

인간의 삶은 수많은 차이의 교차로를 통과하며 얽힌다. 교차로의 통과 신호는 원만한 건넘을 위해 존재하는 장치일 뿐이다. 지나가는 다양한 인간은 교차로에서 멈추지 않는다. 다만 그냥 건너갈 뿐이다. 그곳에는 남녀노소와 인종과 국가와 민족으로 차별하지 않는다. 건너감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신생과 순환과 융합의 과정을 반복할 뿐이다.

 

하지만 내가 사는 도시는 여전히 소통 불감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듯하다. 난립하고, 범람하며, 너저분한 현수막 때문이다. 사업장 홍보, 지자체 정책 홍보, 정당의 구호, 각종 이익단체의 주장이 시민들의 소통을 방해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현수막은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걸려있다. 이로 인해 좋은 정보를 알려줄 때도 있지만, 어떤 요구나 주장을 표현한 구호를 넘어 비방과 혐오가 난무하는 현수막이 너무 많다. 이들 현수막으로 인해 표지판이나 신호등이 가려지기도 한다. 교차로와 주행 도로에 집중적으로 설치되거나 지나치게 낮게 걸려있어 주행과 보행 안전에도 방해가 된다.

 

물론 다수의 현수막은 ‘행사나 집회, 시위가 열리는 기간에만 표시·설치’하고 있지만, 일부의 특정 단체들은, 특정 지역을 독점하는 예도 있다. 현수막은 일종의 옥외광고물이다. 간판·디지털 광고물·입간판·벽보·전단과 함께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 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옥외광고물법)의 규제를 받고 있다. 하지만 법적 효력도 약하고 현수막을 게시한 주체자가 어디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규제는 있으나 마나 하다.

 

얼마 전 필자가 겪은 일이다. “수개월째 같은 자리에 흉물스럽게 걸려있는 현수막을 철거해달라.”는 전화를 구청에 걸었다가 오히려 핀잔 섞인 소리를 들었다. “이런 전화 많이 받았다. 경찰서로 전화해라. 집회 신고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는 담당자의 태도에 아연실색했다. 40만 명이 사는 수지구의 도시 미관을 담당하는 사람이 민원인을 대하는 자세를 보며 용인 특례 시의 품격은, 글쎄다.사족. 수지읍이 수지출장소로, 다시 수지구로 성장하는 모습을 25년 동안 지켜보며 살았다. 소통(통한다)없는 시민의 모습이었다. 소통(통한다)하는 시민의 자격으로 전화를 처음 하고나서 고민에 빠졌다. 특례 시민으로서의 소통(통한다)을 위해 전화를 해야 할 것인가. 소통(멀다)을 위해 전화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