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측자(金側子) … 변하지 않는 사람 1m 83㎝의 큰 키, 솥뚜껑 같은 손, 항공모함 같은 신발 그러나 큰 몸집과 달리 항상 밝은 표정의 얼굴 … 용인시의회 최대 거구인 강웅철 산업건설위원장의 겉모습이다. 다른 시의원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등을 보면 더욱 눈에 띄는 외형의 소유자. 강 위원장이 시의회에 입성한 것은 지난해 7월 3일. 제4회 전국 동시지방선거를 통해 정치인으로, 공인으로 입문했다. 지난 10개월 여 동안 동료의원들이 본 그의 의정활동은 강직함, 그것이다. 자신의 지역구라서 또는 누군가의 부탁 때문에 이런 저런 민원들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지역보다는 시 전체를, 소수의 이익 보다는 다수의 공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기에 그의 큰 모습이 더욱 믿음직스러워 보인다는 평이다. 그는 자신의 생활신조를 ‘금측자(金側子)’라고 소개했다. 직역하자면 ‘금과 같은 사람이 되자’는 것이지만 다시 한번 되내여 보면 ‘금처럼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는 뜻이 담겼다. “아버님께서 해 주셨던 말처럼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는데 살다보니 가장 어려운 것이더군요. 시대가 변하는데 나만 안 바뀌면 되나요. 시대에
서울 강남을 대체할 분당급신도시를 정부가 발표하겠다고 예고한 6월. 용인이 들썩이고 있다. 부동산 업계 뿐 아니라 여러 언론 등에서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을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꼽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자체의 인구수용 계획과도 맞아 떨어져 설득력을 더하고 있는 상태. 이 때문에 올 초 부동산 업체가 앞 다투어 신도시 후보지로 거론 했었던 모현에 이어 또다시 남사의 부동산 시장이 들썩이고 있다. △부동산 업계 용인을 주목하다. 용인은 강남, 분당과 가깝고 평택, 천안으로 이어지는 광역도시축의 초입에 위치한다는 지리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를 끼고 있고 중부고속도로와도 가까워 개발 여건이 타 지역보다 좋다. 분당 개발 이후 용인이 수도권 남부에서 타 지역보다 먼저 개발붐을 타기 시작한 것도, 6월에 예정되어 있는 신도시의 강력한 후보지로 부각 받는 이유 모두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 용인지역에서 신도시 후보지로 거론되는 곳은 모현, 백암·원삼, 남사 등 세 지역이다. 이 지역들은 모두 500만평 규모의 개발이 가능하고 교통여건 또한 타 지역에 비해 좋은 점수를 받고 있다. 그러나 올해 초 유력한 신
숫자를 보면 골치아파 하는 사람들이 많다. 숫자는 우리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면서도 친근함 보다는 계산, 혹은 아파트 평수, 수입, 재산 등 이해타산과 복잡성을 떠올리게 한다. 나이를 생각하며 속상해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숫자 ‘5’를 보면 계절의 여왕이 생각나고 이제 막 피어나는 연한 신록의 청순함이 떠오르기도 한다. 시인이자 수필가 겸 영문학자로 유명한 피천득은 5월이라는 수필에서 ‘5월은 방금 찬물로 세수한 스물한 살의 청순한 얼굴과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투명한 비취가락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숫자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의 정수다. 숫자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계절의 아름다움이지만. 어떤 분이 축사를 하는 자리에서 ‘일십백천만’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다고 하자 다들 골치아픈 숫자를 놓고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며 궁금해 했다. 그러나 곧 그 의미를 듣고는 일십백천만이 그렇게 멋진 인생의 지침을 담을 수 있음에 감탄을 연발했다. 숫자 뒤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 아니 정확하게는 숫자에 아름다운 의미를 부여하는 지혜. ‘일, 십, 백, 천, 만!’ 일! 하루에 한번 남을 위해 봉사하자. 십! 하루에 열 번을 웃자.
‘미래의 아시아를 빚자(Reshaping Asia)’. 지난 4월 28일부터 5월 27일 한달 간 이천·광주·여주 행사장에서 펼쳐지는 ‘2007 제4회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는 5가지 테마 전시회 외에도 ‘흙-불-혼’의 도자 결정체를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는 볼거리, 체험거리, 배울거리 등이 다채롭게 준비되어 있다. △전 세계 고급도자문화를 만난다 이번 비엔날레는 기존 11개 이던 전문성 위주의 공연과 전시회가 핵심 공모전과 기획전 특별전 등 7개로 축소됐다. 전시를 기존 보다 줄이고 특색 있는 체험 행사들이 많이 기획된 것이 2007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의 특징이다. 전시회는 줄었지만 전 세계 66개국이 참가했다. 또한 전 세계 도자작가들의 참여도 늘었다. 세계도자비엔날레가 도자작가들의 등용문으로 든든하게 자리매김한 덕이다. 특히 올해는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우리와 더욱 친숙해진 형제의 나라 ‘터키’의 도자유물도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아시아 각 나라의 도자예술의 전통과 현대를 맛 볼 수 있는 기획전도 눈여겨 볼만하다. 우리의 도자 문화는 이번 세계비엔날레의 최고의 볼거리이다. 우리 도자기의 나갈 방향을 찾고자 기획된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맡은 일은 용인 항일독립운동 기념사업회의 회장직이다. 영면하기 한 달전 85주년 3.1절 기념으로 용인문예회관에서 ‘용인지역 3·1운동의 역사적성격’ 이라는 학술세미나를 개최, 용인지역의 항일운동의 역사를 재조명하며 끝없는 열정을 토해내시던 향사(鄕史) 박용익(朴鏞益)선생은 두달 후인 2004년 5월 11일 새벽 2시10분 별세했다. 그때가 선생의 나이 74세였다. 용인신문 김종경 편집국장이 2004년 봄날 ‘김종경의 용인이야기’를 통해 당시 선생의 타계를 애도하며 썼던 편지글을 다시한번 소개한다. ‘閒見古人書(한견고인서)’ -鄕史 박용익 선생을 떠나보낸 후- 떨어지는 찔레꽃 향에도 질식할 듯한 계절입니다. 박용익 선생님! 아니 박용익 원장님! 며칠 전 석가탄신일에 용인의 어느 고찰을 다녀오다가 불현듯 10여년 넘게 원장님과 함께 다녔던 향토문화유적답사가 생각났습니다. 한동안 제가 용인이야기를 신문에 쓴다며 폼을 잡다가 수개월 동안 절필 아닌 절필을 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기간에는 원장님을 자주 못 뵈었고, 마지막 찾아뵈었을 땐 이미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셨지요. 그날 저녁 원장님의 차가운 손을 잡아보고 돌아선지 몇 시간 만인 이튿
백련사의 주지로 천년고찰을 지키고 있는 법공 스님. 그는 언제나 새벽기도와 참선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백련사와 연이 닿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법공 스님은 “기도란 ‘자업자득’인 셈”이라며 “본인 스스로 닦아야 이룰 수 있으며 어떠한 문제에 의미를 두게 된다면 아무 뜻도 이룰 수 없다”고 기도의 참 뜻을 설명했다. 법공 스님은 “또한 참선하는 자는 집착과 욕심을 버리고 환경에 따라 변할 줄 알아야 하며 마음이 너그러워야 한다”며 “누구나 죄를 지었을 때 자기 자신은 속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려 한다면 반성의 기도와 참선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진흙속에서 깨끗하게 피어나는 연꽃을 바라보며 모든 사람들이 본연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길 기도한다.
# 현장중심의 향토사학자 “모름지기 현장을 중시해야 돼. 발로 뛰어야지. 책상에 앉아서 이것 저것 갖다 붙여 책이 되면 그건 도둑질과 같은 거여. 또 그렇게 만들어진 책을 어떻게 믿어?” 현장을 중시하는 신념으로 걷고 걸은 것이 하루평균 10리. 아무도 관심없는 묘소. 인적 없고 발길 없는 곳에서 향토문화자료를 발견하고 일흔의 나이에 총총걸음으로 찾아와 잘 모르는 얘기를 구구절절 풀어 놓던 분. 바로 오늘 ‘삶의 뿌리를 찾아서’의 주인공인 향토사학자 고(故) 박용익옹이다. 점퍼를 걸친 몸에는 필기도구, 나침반, 줄자가 담긴 낡은 가방 하나와 카메라 한대가 전부였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그 모습이었다. 이렇게 옛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 평생을 돌아다니며 현장을 누비며 셔터를 누르던 그의 족적에는 용인의 역사가 묻어 있었다. 선생은 35년여를 옛 선조들의 사라져 가는 흔적을 찾아 다녔다. 흔적들은 그의 손을 통해 역사가 됐고, 자료가 됐고, 향토문화의 정신도 되살아났다. # 고향사랑의 일편단심 선생은 명문대로 손꼽히는 고려대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지만 낙향을 결심했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지난 68년의 일이었다. 가족들도 “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 향수산에서 천년고찰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에버랜드를 향하는 길가, 벚꽃길을 따라가다 보면 용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백련사(白蓮寺)와 마주친다. 오래된 백련사의 역사만큼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전국에서 에버랜드를 찾은 사람들도 한번씩 들러보곤 한다. # 고요하고 아늑한 천년고찰의 명찰 백련사(주지 법공스님)의 오랜 역사는 1791년 석담대사가 쓴 ‘백련사 약사’와 1985년 세워진 ‘향수산 백련사 사적비’에서 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백련사는 신라 애장왕 2년(801) 신응선사에 의해 창건됐고 고려 창왕 1년(1389)에 천공스님이 고쳐서 지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태종4년(1404) 무학대사가 중건해 18나한상을 봉안, 이후 수경스님과 석담스님에 의해 현종12년(1671), 정조11년(1787)에 각각 중건됐다. 지난 1974년 주위의 산들과 함께 자연농원(현재의 에버랜드) 측으로 소유권이 넘어가 사찰이 존폐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호암 이병철 씨의 배려로 천년고찰의 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이어 안양의 청신녀 청정월의 화주로 요사와 법당을 새로 지어 오늘과 같은 모습을 띄기
가마실 나주정씨의 후손 가운데 다산 정약용선생 같은 분이 배출되셨다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나주정씨 문중사람들은 본래 기질이 검약한 것 같습니다. 벼슬에 욕심을 낸 선조분들이 한 분도 안 계시고, 지금 살고 있는 후손들도 재물에 탐을 내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나주정씨 문중에서 다산선생기념관을 건립하였습니다. 종중의 땅을 매각하고 보상받은 수십억의 재산을 모두 그쪽에 기부하였습니다. 다른 문중에서는 보상비를 분배하고자 소송이 제기되고 난리 법석 아닙니까? 우리 문중 사람들은 어누 누구도 한 푼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이지 자랑스럽습니다. 그같이 청렴한 기질은 멀게는 월헌공(月軒公), 대사헌공, 동원공에게서 부여 받은 것이고, 후대 다산 선생 형제분들에게도 이어졌으며, 현재 우리 문중 사람들에게 연연히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제가 태어난 전대리 가마실 마을은 용인지역 나주정씨의 고향입니다. 350여년 전에 동원공의 자손들께서 정착하시면서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인근 지역에 묘소가 산재해 있습니다. 이 분들의 묘역을 둘러보면 세상을 살면서 선조들에게 누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마을 입구에 있는 효
일반인들에겐 별거 아닌 동네산책. 하지만 장애인에게는 ‘넘기 힘든 벽’일 뿐이다. 휠체어를 탄 채 집밖을 나서기조차 어려운 우리 현실에서 간혹 용기를 내 집밖으로 나서보지만 주변의 차가운 시선과 높은 인도의 턱, 빈약한 편의시설 때문에 금방 후회가 된다. 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도심을 이동하는 것은 일반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어려움이 있다. 걷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인도를 이용하다 보면 5㎝ 높이의 턱이 50m 높이의 장벽보다 높게 느껴진다. 차도로 내 몰린 이들에게 ‘이동’은 목숨을 담보로한 투쟁과 다름없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을 모르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다산선생이 용인과 연관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다. 다산선생은 포곡면 전대리 가마실에 집성촌을 형성하였던 나주정씨 동원공파(東園公派)의 후예이다. 에버랜드가 있어 잘 알려진 포곡면 전대리 입구에서 포곡초등학교를 끼고 돌아서 직진하면 가마실에 다다른다. 가마실은 본래 나주정씨의 집성촌이었다. 마을 어귀에는 1999년도에 용인시 향토유적 제47호로 지정된 정윤복(丁胤福), 정호선(丁好善)의 신도비각이 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서면 바로 나주정씨 문중에서 배출한 효자, 효부비각이 있다. 이어서 마을로 들어서면 마을 한 복판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10월 초에 행해지는 나주정씨시제에는 반드시 은행을 올리는 전통이 있는데, 문중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마을의 왼쪽에는 재실인 영모재(永慕齋)와 동원사(東園祠)라는 편액이 걸린 사당이 있다. 뒤에는 정윤복(丁胤福), 정호선(丁好善), 정호관(丁好寬), 정호약(丁好約)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재실과 묘소사이에는 전나무가 있는데 줄기가 꼿꼿하고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잘 생긴 모습이 마치 선생의 씩씩하고 웅혼한 기상을
용인시 처인구청 근처에 자리 잡은 음악 까페 ‘객석’은 아담하고 조용한 건물 2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소문을 듣고 찾은 ‘객석’은 음악이 나오고 손님들이 삼삼오오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 보면 여느 커피숍과 별다른 점이 없는 듯했지만 까페 한 켠에 있는 정리된 음반들과 컴퓨터, 헤드셋, 마이크가 이곳이 평범한 까페가 아님을 알려준다. 까페 객석의 주인이자 DJ인 정민 씨는 2년 전 용인 구 시가지에 음악 까페 ‘객석’을 열었다. DJ가 있는 음악 까페는 1970~80년대 젊은이들의 문화로 손꼽을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어느새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거의 20년 만에 용인시내 한 귀퉁이에서 다시 새롭게 싹트고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개설한 음악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아마 예전의 DJ가 있는 음악다방과 다른 풍경이 있다면 DJ를 보면서 CJ(Cyber Jockey)로도 활동하는 것일 것이다. 정민 씨는 자신이 CJ로 활동하는 시간에는 까페와 인터넷에 동시에 음악을 소개한다. 인터넷 음악방송을 통해 국내 또는 세계의 여러 지역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음악을 소개하는 한편 까페에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