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62 술빵 냄새의 시간 김은주 컹컹 우는 한낮의 햇빛, 달래며 실업수당 받으러 가는 길 을지로 한복판 장교빌딩은 높기만 하고 햇빛을 과식하며 방울나무 즐비한 방울나무, 추억은 방울방울* 비오는 날과 흐린 날과 맑은 날 중에 어떤 걸 제일 좋아해?** 떼 지은 평일의 삼삼오오들이 피워 올린 하늘 비대한 구름떼 젖꽃판 같이 달아오른 맨홀 위를 미끄러지듯 건너 나는 보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후끈 달아오르고 싶었으나 바리케이드, 가로수는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바리케이드 곧게 편 허리며 잎겨드랑이며 빈틈이 없어 부러 해 놓은 설치처럼 신비로운 군락을 이룬 이 한통속들아 한낮의 햇빛을 모조리 토해내는 비릿하고 능란한 술빵 냄새의 시간 끄억 끄억 배고플 때 나는 입 냄새를 닮은 술빵의 내부 부풀어 오른 공기 주머니 속에서 한잠 실컷 자고 일어나 배부르지 않을 만큼만 둥실, 떠오르고 싶어 *1991년에 발표된 일본 애니메이션 제목. ** ‘추억은 방울방울’에 나오는 대사. -------------------------------------------------------------------- 여기 실업수당을 받으러 가는 한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61 5월 A 박목월 비닐우산을 쓰고 직장을 나선다 날씨를 근심하면서 인사를 하면서 비닐우산 속에 모든 얼굴은 젖어있다 가난한 생활인의 호젓하게 외로운 심령 물론 그들의 눈에 비닐우산이 보일리 없다 -------------------------------------------------------------------- 당신과 함께 인 듯 아닌 듯, 박목월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 ‘구름에 달 가듯이’에 다녀왔습니다. 시인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 있었는데요. 미발표 시고를 비롯해 초판본 시집, 강의노트, 편지, 가족사진 등을 보았습니다. 오늘의 시「5월 A」역시 미발표 시고 중 한 편이지요. 시인의 육필에서 육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담담한 어조가 시의 행간을 더욱 아득하게 만들어주는 시편이지요. 함께 읽으면 좋을 산문 한 편을 소개해 드릴게요. 시인의 산문은 시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도 직업이 시인이요, 교수다. 아니, 교수요, 시인일지 모른다. 어느 것이 우위이든 그것은 별문제다. 교수라는 극히 산문적인 생활과 시라는 창조적인 생활을 겸한 것이 현재의 나의 생활이다.”(박목월 지음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60 돌고래 선언문 최지인 손과 죽음을 사슬이라 부르자. 그들이 손가락을 걸고 있는 모습을 엉켜 있는 오브제라 부르자. 그들은 손가락을 쥐고 엄지와 엄지를 마주한다. 구부러진 몸이 손을 향해 있다. 손이 죽음을 외면하는 것을 흔적이라 부르자. 빠져나갈 수 없는 악력이 그들 사이에 작용한다. 손이 검지와 중지 사이 담배를 끼우고 죽음은 불을 붙인다. 타오르는 숨김이 병원 로고에 닿을 때 그들의 왼쪽 가슴은 기울어진다. 손에 입김을 불어넣어 주자. 손이 기둥을 잡음으로써 손은 기둥이 되고 그것을 선(善)이라 부르자. 죽음이 선의 형상을 본뜰 때, 다리를 반대로 꼬아야 할 때, 무너질 수 있는 기회라 부르자. 사라진 손을, 더듬는 선을, 부드러운 사슬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들의 호흡이 거칠어지면 담뱃재를 털자. 흩어짐에 대해 경의를 표하자. 한 시인의 선언문을 읽는 밤입니다. 봄밤에 읽는 선언문…. 사람과 사람이 “손가락을 걸고 있는 모습을 엉켜 있는 오브제라 부르자”는 제안이 들려오네요. 이내 “손가락을 쥐고 엄지와 엄지를 마주”하는 약속이 이뤄집니다. 이제 “빠져나갈 수 없는 악력이 그들 사이에 작용”하겠지요. 당신에게는 ‘사이’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9 좋은 언어 신동엽 외치지 마세요 바람만 재티처럼 날려가버려요. 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 아래로 낮추세요. 그리고 기다려보세요. 모여들 와도 하거든 바닥에서부터 가슴으로 머리로 속속들이 굽이돌아 적셔보세요. 하잘것없는 일로 지난날 언어들을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허지만 그때까진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 좋은 언어와 좋은 세상을 나란히 꿈꿔봅니다. 신동엽 시인은 한 산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지요. “지금은 싸우는 시대다. 언어가 민족의 꽃이며 그 민족의 공동체적 상황을 역사 감각으로 감수 받은 언어가 즉 시라고 할 때, 오늘처럼 조국과 민족이 그리고 인간이 굶주리고 학대받고 외침되어 울부짖고 있을 때, 어떻게 해서 찡그림 속의 살 아픈 언어가 아니 나올 수 있을 것인가.”(「60년대의 시단 분포도」)라고 말입니다. 어쩌면 오래전의 열망이 오늘의 열망과 이토록 닮아있을까요. 여기서의 “살 아픈 언어”는 “좋은 언어”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8 아침을 기리는 노래 문태준 시간은 꼭 같은 개수의 과일을 나누어 주시네 햇볕, 입술 같은 꽃, 바람 같은 새, 풀잎 같은 잠을 나는 매일 아침 샘에 가 한통의 물을 길어오네 물의 평화와 물의 음악과 물의 미소와 물의 맑음을 내 앞에는 오늘 내가 고를 수 있는 물건들이 있네 갈림길과 건널목, 1월 혹은 3월 혹은 9월 혹은 눈송이, 첫 번째, 분수의 광장, 거울 그리고 당신 당신이라는 만남 당신이라는 귀 당신이라는 열쇠 -------------------------------------------------------------------- 일교차가 큰 요즘입니다. 꽃도 사람도 각방을 쓰지 않는, 봄과 여름에 어리둥절해 하는 것 같지요. 꽃놀이도 좋지만 한 사람의 안색을 살피는 일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최근 출간된 문태준 시인의 시집『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창비) 자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날 수 있지요. “대상과 세계에 솔직한 말을 걸고 싶었다. 둘러대지 말고 짧게 선명하게”. 어쩌면 시는 ‘삶에 말 걸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상이 모여 일생이 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아침은 언제나 새날이지요. 혹여 눈 뜨는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7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이영주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너의 몸을 안지 않고서는 차갑고 투명한 살을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쓸어보지 않고서는 일 년 동안 너는 바다 속에서 물처럼 흘러가고 있다 너는 심연 속에서 살처럼 흩어지고 있다 발이 없어서 우는 사람 오래전부터 바다는 잠을 자고 있어서 죽음을 깨우지 못한대 너는 묘지도 없이 잠 속에서 이빨을 갈며 떨고 있다 너는 죽음을 시작할 수가 없다 산 자들은 항상 죽은 자 주위로 모여든다고 하는데 우리는 슬픔도 없이 모여 있다 진정한 애도는 몸이 없이 시작되지 않는다 모든 비밀은 바다 속에 잠겨 있다 바다에서 죽지 않는 손이 올라온다 그 손을 잡아끌어 올려야 한다 ---------------------------------------------------------------------------- 봄날은 간다, 라는 말처럼 모든 슬픔은 현재진행형인 것 같습니다. 꽃 보는 일이 마치 죄 짓는 일처럼 느껴지는 봄날. 여기 한 시인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퍼지고 있네요. 소중한 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 슬픔조차 시작할 수 없는 처지란 어떤 걸까요. “너의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6 봄 편지 이문재 사월의 귀밑머리가 젖어 있다. 밤새 봄비가 다녀가신 모양이다 연한 초록 잠깐 당신을 생각했다. 떨어지는 꽃잎과 새로 나오는 이파리가 비교적 잘 헤어지고 있다. 접이 우산 접고 정오를 건너가는데 봄비 그친 세상 속으로 라일락 향기가 한 칸 더 밝아진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으려다 말았다. 미간이 순해진다. 멀리 있던 것들이 어느새 가까이 와 있다. 저녁까지 혼자 걸어도 유월의 맨 앞까지 혼자 걸어도 오른켠이 허전하지 않을 것 같다 당신의 오른켠도 연일 안녕하실 것이다. -------------------------------------------------------------------- 오늘 도착한 봄 편지 함께 읽어볼까요. 문득 바라본 “사월의 귀밑머리가 젖어 있”습니다. 봄비의 흔적이지요. 그 순간 “연한초록/잠깐 당신을 생각”하는 일은 자연스럽습니다. ‘자연(自然)’이라는 말 참 좋지요. 스스로 그러하다니요! 꽃잎과 이파리는 저렇게 잘 헤어지는데, 사람의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한 노시인은 헤어지는 일이라고 답했다지요. 그런가하면 이문재 시인은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5 미열(微熱) 사이토우 마리코 나무에게서 사람에게로 옮는 병이 있다. 땅에다 깊이 뿌리박으면서 하늘을 날고 싶다는 병에 걸리는 이가 있다. 몸통을 쪼개 갖고 자기 나이테를 보고 싶어지는 병이 있다. 자기 몸에다 많은 새들을 앉게 하고 싶어지는 병. 잎사귀 수만큼의 눈빛들을 살랑거리며 서 있고 싶다는 병. 거기에 서고 싶다는 병. 같은 데에 날마다 새롭게 기다리지 말고 늦지도 말고 서 있고 싶다는 병. (…) ----------------------------------------------------------------------------- 모국어, 라는 말은 왜 무턱대고 뭉클할까요. 그런데 이채롭게도 우리말로 시를 쓰는 일본 시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처음 한국말을 배웠을 때 나무란 낱말이 나의 가슴속으로 뿌리를 박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지요. 수시로 미열이 찾아오는 봄날입니다. 구름에게서 나무에게로 나무에게서 인간에게로 말이지요. 당신이 창문 바라보는 일이 잦다면, 일상에 얽매인 뿌리를 잠시 잊고 하늘을 날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순간순간 마음의 나이테를 그리다 침묵에 빠지곤 하시나요. 잘 살고 있는 건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4 풍선 김사인 한번은 터지는 것 터져 넝마 조각이 되는 것 우연한 손톱 우연한 처마 끝 우연한 나뭇가지 조금 이르거나 늦을 뿐 모퉁이는 어디에나 있으므로. 많이 불릴수록 몸은 침에 삭지 무거워지지. 조금 질긴 것도 있지만 큰 의미는 없다네. 모퉁이를 피해도 소용없네. 이번엔 조금씩 바람이 새나가지. 어린 풍선들은 모른다 한번 불리기 시작하면 그만둘 수 없다는 걸 뽐내고 싶어지지 더 더 더 더 커지고 싶지. 아차, 한순간 사라지네 허깨비처럼 누더기 살점만 길바닥에 흩어진다네. 어쩔 수 없네 아아, 불리지 않으면 풍선이 아닌 걸. -------------------------------------------------------------------- 봄인 듯 연두인 듯 불러보는 당신입니다. 오늘은 ‘풍선’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시인이 들려주고 있는 것처럼, 모든 풍선은 우연한 이유로 꼭 한 번은 터지게 됩니다. 그 순간이 저마다의 삶의 리듬처럼 “조금 이르거나 늦을 뿐”이지요. 돌고 돌아도 마주치게 되는 모퉁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어른들이 아무리 알뜰하게 타일러도, “어린 풍성들은 모”릅니다. 아니 알아도 자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3 나비를 읽는 법 박지웅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듯 떠오르는 아슬한 탈선의 필적 저 활자는 단 한 줄인데 나는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나비는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다 울퉁불퉁하게 때로는 결 없이 다듬다가 공중에서 지워지는 글씨 나비를 천천히 펴서 읽고 접을 때 수줍게 돋는 푸른 동사들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 육필의 경치를 기웃거릴 때 바람이 훔쳐가는 글씨 ----------------------------------------------------------------------------- 이 봄, 나비와 꽃 가까이에 머물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시인이 시를 쓰듯, 꽃은 ‘나비’라는 활자를 통해 어떤 전언을 보내고 싶은 걸까요. 구구절절이 아니라, “저 활자는 단 한 줄”이랍니다. 그러니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는 일이 무리는 아니겠지요. 정독의 정독을 거듭하다 깨닫습니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즉 “나비는 아름다운 비문임을” 말이지요. 어쩌면 세상 모든 편지는 비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2 콜! 김민정 예컨대 미용실 옆자리에 앉은 여대생이 가수 현미처럼 파마해주세요라고 주문할 때 예컨대 택시를 타고 남가좌동 명지대를 가는데 서울31바9896 남진우 기사 이름이 하필 그럴 때 예컨대 베이징 올림픽 남자 핸드볼 경기에서 해설자가 조지효 선수 참 좋지요라고 말장난을 칠 때 예컨대 쿠싱증후군에 걸린 둘째 이모 양미미 씨가 아침에 짠 스웨터를 밤에 죄다 풀며 죽어갈 때 -------------------------------------------------------------------- 세상은 수많은 ‘예’들로 가득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컨대’라는 말을 쓰게 되는데요. 만약 “미용실 옆자리에 앉은/여대생이/가수 현미처럼 파마해주세요라고 주문할 때” 우리는 의아해 하겠지요. 그런가하면 “서울31바9896 남진우 기사 이름이 하필 그럴 때”도 있답니다. 남진우 시인은 명지대 교수. 우연인 듯 우연 아닌 우연 같은 ‘예’라고 할 수 있지요. 텔레비전을 보다 미소 짓기도 합니다. “해설자가/조지효 선수 참 좋지요라고 말장난을 칠 때” 우리는 압니다. 한 마디의 말이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걸. 여기까지의 ‘예’가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1 꽃처럼 무거운 마음 ㅡ2014년 봄 김중일 꿈속에서 밝혀놓은 촛불이 다 타 버리자 해가 떴다 기도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떨어진 달처럼 무거운 마음 내가 한 번도 가진 적 없는 마음이 내 정수리 위에 비행접시처럼 떠 있다 그 그림자는 잠시 지구를 덮고 내 정수리 속으로 서서히 내려앉는다, 가라앉는다 나의 뇌수를 고요히 헤집자 온갖 기억이 새떼처럼 날아오른다 나의 코끝을 스치자 물양동이 같은 내 얼굴 속에 그득했던 눈물이 출렁이며 넘친다 내 목구멍을 꺽꺽 긁으며 내려가다가 멀미처럼 울컥 솟구치는 마음 다시 내 기도를 막으며 가라앉는 마음 지구 반대편 하늘까지 뻥 뚫린 우물 속에 물양동이처럼 던져진 마음 내 무릎을 꺾고 내 발등을 찧는 돌처럼 무거운 마음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연루됐을 때 온몸이 다 녹아 줄줄 흘러내리고 있을 때 깊은 밤이 뻗은 힘센 팔이 나를 포옹하듯 꿈속으로 잠깐 끌어당기고, 꿈속에서야 나는 겨우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고 꿈밖에선 어떤 말도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이 눈코입귀 흔들리는 꽃잎처럼 떨어지는 마음 꽃잎 없는 꽃처럼 무거운 마음 마음이 걷다가 빠진다는 구름의 크레바스 틈새로 후드득 꽃잎처럼 빨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