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눈을 떴을 때 이우성 모래는 모래 위에서 계속 길을 덮으며 나아갔다 나는 모래를 주워 먹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모래였다 나는 맨발이었고 모래를 밟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래는 잊힌다 모래는 내 몸속에서 길을 낸다 그리고 바다에 닿는다 나는 그곳에서 수영을 하고 있다 멀리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이다 모래처럼 나도 노력을 한다 슬픔을 모르기 때문에 모래는 방향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래는 괜찮을까 의미 없이 바람이 불고 나는 한 개의 모래가 될 때까지 흩어지는 것이다 붙지 않는 살 나는 모래를 그렇게 부른다 몸에서 바람이 부는 사람은 바다에서 걸어왔고 눈에서 모래를 쏟는 사람이 나를 낳았으며 서둘러 죽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 모래는 전생으로 가는 길을 낸다 그러니 나의 불화여, 울라 ------------------------------------------------------------ 모래와 나와 방향과 슬픔에 관한 이야기, 모래와 나는 “멀리 어디로 가고 싶은” 존재들. 그곳에 닿기 위해 “모래처럼 나도 노력” 하는 중. 그러나 모래와 나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슬픔을 모르기 때문에 모래는 방향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 문
따뜻한 상징 정진규 어떤 밤에 혼자 깨어 있다 보면 이 땅의 사람들이 지금 따뜻하게 그것보다는, 그들이 그리워하는 따뜻하게 그것만큼씩 춥게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눈물겨워지는지 모르겠다 조금씩 발이 시리기 때문에 깊게 잠들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눈물겨워지는지 모르겠다 그들의 꿈에도 소름이 조금씩 돋고 있는 것이 보이고 추운 혈관들도 보이고 그들의 부엌 항아리 속에서는 길어다 놓은 이 땅의 물들이 조금씩 살얼음이 잡히고 있는 것이 보인다 요즈음 추위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요즈음 추위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들의 문전마다 쌀 두어 됫박쯤씩 말없이 남몰래 팔아다 놓으면서 밤거리를 돌아다니고 싶다 그렇게 밤을 건너가고 싶다 가장 따뜻한 상징, 하이얀 쌀 두어 됫박이 우리에겐 아직도 가장 따뜻한 상징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인에게 듣는 ‘따뜻한 상징’ 이야기입니다. 문득, 자주 멀리서 가까이서 잠든 한 사람을 생각하는 밤과 밤들. 시인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 땅의 사람들’을 떠올립니
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월훈(月暈) 박용래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뚝,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 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은규 시인의시로 쓰는 편지 북방(北方) 안도현 물 좋은 명태의 대가리며 몸통을 칼로 쫑쫑 다져 엄지손톱 크기로 나박나박 썬 무와 매운 양념에 버무려 먹는 찬이 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명태선이라 한다 국어사전에는 물론 없다 이 별스럽고 오래된 반찬은 눈발의 이동경로를 따라 북방에서 남으로 내려왔을 것 같다 큰 산에 눈 많이 내리거나 처마 끝에 고드름 짱짱해야 내륙의 부엌에서는 도마질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이것을 나는 노인처럼 편애하였다, 들창에 눈발 치는 날 달착지근한 무를 씹으면 입에서 눈 밟는 소리가 나서 좋았고, 덜 다져진 명태뼈가 가끔 이에 끼여도 괜찮았다 나도 얼굴을 본 적 없는 할아버지 맛있게 자셨다는 이것을 담글 때면 어머니는 솜치마 입은 북쪽 산간지방의 여자가 되었으리라 그런 날은 오지항아리 속에 먼 바다를 귀히 모신다고 생각했으리라 갓 담근 명태선을 놓고 아들과 함께 밥을 먹는 오늘 저녁, 눈발이 창가에 기웃거린다 북방한계선 밑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은, 수만 마리 명태떼가 몰려오고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삽십 분 김상혁 미친 아이가 집 앞에서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저기서 언덕을 밀고 있어요. 그래 나는 호의를 베풀려고 언덕이 얼마나 움직였는지 되물었다. -어제는 십분, 오늘은 이십 분을 밀었지요. 여름의 뜨거운 정오라서 먼 풍경은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가 계속 잘하고 있었구나. 시간이 정말 흐르고 있겠구나. ----------------------------------------------------------------------------- ‘미친 아이’(아마도 세상이 그렇게 호명했을)와 ‘내’가 마주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고사, 우공이산(愚公移山)이 떠올리게 하는 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지나친 고민의 시간 대신 발자국을 내딛는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는 어떤 말씀도 아니고 가르침은 더더욱 아니고, 한 방향을 다같이 바라보자는 정언명령이 아니지요. 그저 질문하고 답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백지 속에 찍힌 활자들이 서로 어울려 한 세계를 이루는 기적, 시만이 할 수 있는 그 능력을 바라봅니다. 아이와 나는 서로 조응하기도 하지만, 극과 극의 당김 속에 팽팽한 기류가 흐
이은규 시인의시로 쓰는 편지 거짓된 눈물의 역사 김중일 (…) 새벽잠에서 깨어난지 오래됐는데,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지 오래됐는데, 잠보다 너무 길고 어두웠던 꿈에서 깨어났을 때, 처음 맞닥뜨린, 내 옆에 모로 누운 허공의 어정쩡한 자세, 나 어렸을 때 병이 깊어 복수 찬 배를 땅에 질질 끌며 마당 한 바퀴 돌고, 집 버리고 나가 죽은 그 작던 강아지만한 눈물 한 방울이 오늘밤 내 발등에 떨어져 김이 모락모락 나도록 따뜻하고 축축하게 삶은 작은 행주 같은 혀로 내 발등부터 나를 닦아낸다 먹고 살고 죽는 저 높은 식탁위에 물얼룩처럼 묻은 나를 말끔하게 아무런 흔적도 없이 감쪽같이 ----------------------------------------------------------------------------- 시인은 역사에 대해 말합니다.‘거짓된 눈물’의 역사에 대해 말이지요. 어쩌면 역사란, ‘잠보다 너무 길고 어두웠던 꿈’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 순간을 대면하는 것이 역사적 과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모든 인식적 가치를 지닌 작품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 새로운‘무언가’를 알게 합니다. 그 ‘무언가’는 과학, 철학
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114 포도나무를 태우며 허수경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 어느 날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터뜨릴 울분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고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습니까 지금 타오르는 저 불길은 무덤입니까 술 없는 음복입니까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가을달이 지고 있습니다 ----------------------------------------------------------------------------- 모국어에 대한 탁월한 감각, 삶을 탐사하는 고고학적 상상력, 울먹울먹한 감수성이 여기 있습니다. 인간의 근원적 슬픔을 노래해온 허수경 시인의 새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펼칩니다. 오늘의 시는 포도나무 이야기. 모든 ‘사이
이은규 시인의 시로쓰는편지 113 꿈 신용목 잤던 잠을 또 잤다. 모래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잠이었다. 누구의 이름이든 부르면, 그가 나타날 것 같은 모래밭이었다. 잠은 어떻게 나의 바닥을 다 메우도록 그 많은 모래를 옮겨왔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멀리서 모래를 털며 걸어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모래로 부서지는 이름들을 보았다. 가까워지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해변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잤던 잠을 또 잤다. 꿨던 꿈을 또 꿨다. 나는 언제부터 파도 소리를 듣고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그리고 언제까지……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돌아보았다. ----------------------------------------------------------------------------- 침묵의 가을. 어쩌면 삶은 잤던 잠을 또 자고, 꿨던 꿈을 또 꾸는 나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처음인 것처럼 깊은 잠에 빠지고 새로운 꿈을 꾸게 되지요. 기억을 기억하며 혹은 기억을 기억하지 않으며 말이지요. 시인의 산문집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에는 다음과 같
이은규의시로 쓰는 편지 지상의 시 김현승 보다 아름다운 눈을 위하여 보다 아름다운 눈물을 위하여 나의 마음은 지금, 상실의 마지막 잔이라면, 시는 거기 반쯤 담긴 가을의 향기와 같은 술……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사라지는 것만이, 남을 만한 진리(眞理)임을 위하여 나의 마음은 지금 저무는 일곱시라면, 시는 그곳에 멀리 비추이는 입다문 창(窓)들…… 나의 마음은—마음바다 로맨스 그레이로 두른 먼 들일 때, 당신의 영혼을 호올로 북방(北方)으로 달고 가는 시의 검은 기적— 천사들에 가벼운 나래를 주신 그 은혜로 내게는 자욱이 퍼지는 언어의 무게를 주시어, 때때로 나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시는 오오, 지상의 신이여, 지상의 시여! -------------------------------------------------------------------- 시가 익어가는 계절, 가을. 시적 주체가 소망하는 것은 ‘보다 아름다운 눈’이나 ‘보다 아름다운 눈물’로 표상됩니다. 물론 여기서의 ‘아름다움’은 유미주의적이고 자족적인 심미성(審美性) 그 자체만은 아니겠지요. 그것은 경지로서의 ‘아름다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삶은 ‘채우기 위해 비우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진정한 국가기관’이란 치안 유지 등의 ‘야경[夜警]국가’적 기능을 넘어, 그 국가에 어울리는 소양과 덕목을 갖춘 ‘의로운 시민’을 길러내는 곳이라고 명시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현재 대한민국의 군복무 체제는 아직은 야경국가적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이는 분명 사회적으로 큰 손실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세계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상황적 특수성과 청년들의 국가관 및 시민의식 함양 등을 생각하면, 긍정적 효과도 적지 않다. 그런면에서 의경 개인의 발전을 장려하기 위한 경찰 조직의 노력은 의미가 크다. 그들이 하는 일들은 ‘국방의 의무’ 역할 뿐만아니라, 성숙한 민주시민으로서도 그 몫을 다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상당한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행하고 있는 개인발전 장려 프로그램을 몇 가지 소개하자면, 첫째로 각종 대민봉사활동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단체 봉사를 통해 대원들은 더불어 사는 공동체사회 속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바람직한 가치관을 형성하게 된다. 두 번째로는 ‘노터치타임’ 제도이다. 해당 시간동안 실질적인 자기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전자도서관을 운영하며 자격증 취득 시 특별 외박을 부여함으로
이은규 시인의시로 쓰는 편지 백석역 최서진 도시를 지나 대곡역과 마두역 사이 지혜가 없어져서 날은 저무는데 눈은 오지 않고 도깨비의 얼굴을 닮은 바람이 분다 사람들은 팔짱을 낀 채 바쁘게 지나가고 절벽의 표정으로 이야기하던 연인들은 손을 놓고 사라진다 나는 홀로 눈물이 나 기다려도 오지 않을 당신 때문에 울컥 목이 메인다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줍지 않는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나타샤가 오지 않아도 괜찮지만 자꾸만 계단 쪽으로 눈이 간다 계단은 홀로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저녁이면 무엇이 백석으로 오게 하는가 백석을 지나 대화로 가는 지하철을 길게 바라본다 지하철이 지나가고 지하철이 또 지나간다 기다림이 지나간다 기다린다는 것은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일 충분히 좋은 일 분별을 잃은 눈으로 조용한 역사에 서 있다 손을 녹이려고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마신다 입가에 고인 검은 기억이 속으로 들어가자 서러워진다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안고 앉아서 천천히 마신다 도무지 기다림을 참을 수가 없지만 이런 것은 흔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얼어붙은 자세로 기다림을 기다린다 누군가 시간의 반대편에서 아무로 모르게 달려오고 있으니 나는 외로워할 까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111 산다 다니카와 슌타로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지금 멀리서 개가 짖는다는 것 지금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 지금 어디선가 태아의 첫울음이 울린다는 것 지금 어디선가 병사가 다친다는 것 지금 그네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 지금 이 순간이 흘러가는 것 -------------------------------------------------------------------- 오늘의 시인, 일본의 다니카와 슌타로(谷川俊太郞). 일상의 기적에 대해 노래하는 시인입니다. 그는 1950년 데뷔한 이후 최근까지 80여 종의 시집과 시선집을 출간했다고 합니다. 일상이 모여 일생이 되는 것. 온 시간을 다해 문학에 매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시인은 ‘살아 있다는 것’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이 흘러가는 것’이라는 구절에서 별똥별의 흐름을 연상할 수도 있겠지요. 우연적 필연이거나 필연적 우연인 삶. 시인은 산문 「시인과 우주(cosmos)」에서 ‘한 편의 시’가 ‘쓰고 싶다’에서 출발해서, ‘쓰지 않으면 안 된다’를 통해 완성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살고 싶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