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서효인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다시는 못 올 것이라 생각하니
비가 오기 시작했고, 비를 머금은 공장에서
푸른 연기가 쉬지 않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흰 빨래는 내어놓질 못했다
너의 얼굴을 생각 바깥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나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있었다
이 도시를 둘러싼 바다와 바다가 풍기는 살냄새
무서웠다 버스가 축축한 아스팔트를 감고 돌았다
버스의 진동에 따라 눈을 감고
거의 다 깨버린 잠을 붙잡았다
도착 이후에 끝을 말할 것이다
도시의 복판에 이르러 바다가 내보내는 냄새에
눈을 떴다 멀리 공장이 보이고
그 아래에 시커먼 빨래가 있고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 다시 바다가 나타나고
길이 나타나고 여수였다
너의 얼굴이 완성되고 있었다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네 얼굴을 닮아버린 해안은
세계를 통틀어 여기뿐이므로
표정이 울상인 너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무서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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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질문과 대답처럼 이 시국에도, 봄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문득 여수 밤바다를 떠올려 봅니다. 오늘의 시인은 여수와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네요. 시인의 시집 『여수』에 담겨있는 시인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밤의 바다보다는 낮의 굴뚝이 더 인상적인 도시였다. (중략) 회백색 매연이 쉬지 않고 도시의 하늘을 덮어 가렸다. 나는 반성을 모르는 굴뚝이었다.” 아마도 시인에게 여수는 뼈아픈 통찰의 장소인 것만 같지요. 이 지점에서의 여수는 물리적 공간 너머의 심상지리(心象地理)에 가깝겠지요. 그곳은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 다시 바다가 나타나고/길이 나타나”는 곳. 한 장소에 대한 기억은 곧 한 사람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출발하고 또 도착하는 것이겠지요. 오직 ‘너’여야만 하는 이유, “네 얼굴을 닮아버린 해안은/세계를 통틀어 여기뿐이므로”. 그러므로 당신은 내게 세계를 통틀어 가장 소중한 존재, 소중한 기억.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