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귀 씻기는커녕 발 씻기에도 더러운 시국에 가을 서정이라니
이경철(시인, 전 중앙일보문화부장)
“창랑수여!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물이 더러우면 내 발을 씻겠네.” 중국 춘추전국시대 시인 굴원의「어부사(漁父辭)」한 대목이다. 초나라에서 고관대작을 지내다 파직당해 강가를 거닐며 어부와의 대화체의 이 글을 썼던 굴원은 세상 하 더러워 못살겠다며 강물에 빠져죽었다.
갓끈이나 발을 씻는다는 말보다 ‘귀를 씻는다(洗耳)’는 말이 원조이다. 인류 최초로 태평시대를 연 저 요순(堯舜)시대 요임금이 세상에서 허유만한 어질고 똑똑한 자가 없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가 임금 자리를 넘겨주려했다. 허유는 더러운 소릴 들었다며 강물에 귀를 씻고 더 깊은 곳으로 숨었다는 이야기에서 허정한 마음을 위해 갓끈을 씻고 발을 씻는다는 말은 유래됐을 것.
아, 그러나 요즘 시국은 정말이지 눈과 귀를 아무리 씻고 씻어도 더러워 못 견디겠다. 나라를 사적으로 말아먹어버리려 했던 자들도 그렇고, 백일하에 죄상이 드러나고 있는데도 단죄도 못하는 검찰도 그렇고, 이 시국을 수습할 현자가 있긴 할 텐데 저들끼리 또 말아먹으려 천거하기 꺼려하는 정치권도 그렇다.
그래서인가. 곱게곱게 물들어 가는 가을을 밝혀야할 단풍도 한심하고 추접스럽게만 보인다. 지난여름 폭염에 바싹바싹 타버린 놈, 푸르딩딩 얼어붙어버린 놈, 막 물들어 오르다 어느 바람에 팔랑팔랑 떨어져버리는 놈 등등 불쌍한 놈들만 지천으로 가득하다.
경안천변 억새밭을 거닐어도 허옇게 머리 풀고 달려드는 미친 여자들로 보이고 여울목에서 외다리로 서 먹잇감 없나 골똘한 왜가리며 백로들도 양두구육(羊頭狗肉) 족속들로만 보인다. 모현 지석묘 고인돌 찢어진 가슴팍에서 울려나오는 귀뚜라미 울음만 이 처량한 가을과 시국을 우리 모두를 대신해 울어주고 있다.
그래 고인돌 앞 벤치에 앉아 핸드폰 이어폰을 꼽고 쇼팽의 야상곡을 듣는다. 비가 올라나 눈이 올라나 며칠째 먹먹하던 하늘에서 찬비가 똑, 똑 듣는다. 쇼팽의 피아노 건반처럼 내 온몸과 마음에 듣는다. 그래 이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이 시국에 눈과 귀를 씻으며「쇼팽 녹턴 19번」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써봤다.
가을 찬비 내립니다.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느티나무 잎사귀에도
무정한 세월 풍화돼가는 고인돌 가슴팍에도
가슴팍 틈새서 찢어져 나오는 귀뚜라미 울음소리에도
발자국 자국마다 잊자며 걷는 산허리길에도
점차 굵어져가는 찬비 똑, 똑 두드리며 소름을 돋웁니다.
냉정하게 두드리며 잊자고 아주 잊어버리자고 할수록
그대와 나 인연의 여음餘音만 더 살갑게 기워가는
저 이율배반二律背反의 선율.
찬비 내려 이 가을 한량없이 쓸쓸한 것들
온몸으로 떨게 합니다.
어때, 이런 시국에 너무 한가한 시인가. 그렇담 쇼팽의 녹턴 다시 한 번 들어보시라. 같은 악보인데도 피아노 연주자에 따라 그 소리의 깊이가 각각 다르다. 악보에 어긋나지 않게 치는 데도 음색의 강약과 여음의 장단에 따라 그 맛이 천차만별이다. 다른 곡도 마찬가지겠지만 연주자의 기량과 마음의 안정, 그리고 듣는 이의 마음이 교감할 때라야 깊은 울림을 주는 곡이 특히 쇼팽의 피아노 독주곡들이다.
그런 쇼팽의 곡을 듣고 마음의 안정을 위해 가을날의 서정을 두르려본 시이다. 정말이지 이런 더럽고 어지러운 때 쓸쓸함이니 그리움을 읊조리는 시는 나도 쓰기 싫다. 후련하게 고발하고 성토하고 욕해주는 시와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그런 시들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차분히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그리움을 노래하는 순정한 마음들이 있기에 더러운 세상도 정화되는 것을. 태평성대여야 인심도 순화되고 문화의 질도 높아질 텐데 세상 이렇게 더러워서야 욕지거리밖에 안 나오니. 지난 20세기 후반기 독재보다도 참아내기 더 어려운 세상, 발을 씻기에도 더러운 이 21세기 물이라니, 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