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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부리 시첩-이경철

고인돌과 당산나무, 노고봉과 마구산 가을이야기

이경철(시인, 전 중앙일보문화부장)

 

 

추석 연휴 지나고 나서부터 완연한 가을이다. 우주 끝 너머까지 다 비칠 것 같은 투명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 맑은 햇살에 낯짝을 씻고 있는 노고봉 마구산 정광산 태화산 연연이 이어지는 산봉우리 봉우리들 이마에 말갛게 부딪치며 가을은 오고 있다.

 

초부리 초록전원마을에서 이사와 새로 둥치를 튼 왕산리 외대 앞 고층아파트 맨 꼭대기. 한쪽으론 산봉우리들과 이마를 마주하고 반대쪽으론 경안천을 굽어보는 이 높이가 나무 꼭대기에 둥지 튼 까치집 같다. 아니나 다를까. 초부리 뒷산 까마귀 봉에서 날아온 까마귀 떼들이 창을 스치듯 날며 형아, 왜 이 높은 데까지 왔냐고 깍깍거리곤 간다.

 

나이도 어느덧 가을어름 붙일 곳 없는 마음에 노인들은 이 가을날을 뭐하며 보낼까 문득 궁금해 집 앞 고인돌 터로 나가봤다. 경기도 남부에서 가장 크다는 고인돌 두 기가 있는 모현 지석묘 터에 조성된 작은 쉼터. 등나무 아래 마련된 평상에는 늘 노인네 몇 분 옹기종기 모여드는 곳이다.

 

집 드나드는 길 그냥 지나치기만 하다 문득 물으니 나 또한 나보다 더 지긋한 사람들은 뭐하며 보낼까 궁금해 여기 오고 있소란다. 그러면서 눈짓으로 고인돌과 그것을 지키며 서 있는 수백 년은 거뜬히 됐을 당산나무를 가리킨다. ‘나 또한 그러고 있으니 그들에게 물어보라는 듯.

 

그래 그럴 것이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의 눈짓이다. 수천수만 년 우리네를 지켜봤을 고인돌과 당산나무에게 이 가을을 물어봐야할 것이다. 이 나이, 붙일 데 없는 이 심사도 고인돌같이 붙박여 있을 내 마음의 뿌리에 물어봐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새로 둥지를 튼 이곳에는 근본을 둘러보며 자문자답해야할 거리들이 많다. 고인돌도 그렇고 노고봉, 마구산 등 산 이름들 또한 그렇다.

 

고인돌은 반석같이 큰 돌을 올려놓은 묘이면서도 제단이기도 하다. 돌의 무게만도 수백 톤에 이르는 것도 있고 또 주로 하천이나 바닷가 혹은 낮은 구릉 등에서 발굴돼 살기 좋은 곳에 모여 살던 집단이 수백, 수천 명씩 모여 장례도 치르고 제사도 지내던 곳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발굴된 고인돌 7만여 기중 그 반 이상이 이 좁은 한반도에 있다. 예부터 한반도가 살기에 좋았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흘러들어 수백 수천 명씩이 일시에 나설 수 있는 고대국가들을 일찍부터 세웠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선사시대 그런 이야기들을 고인돌들이 사실로 들려주고 있다.

 

이 고인돌 뒤로 연연이 솟아있는 노고봉, 마구산 또한 고인돌을 세운 선사시대인들이 부른 이름에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저 지리산의 노고봉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나라에 노고산이나 마고산 혹은 마구산이란 이름도 널려있다. ‘노고(老姑)’는 늙은 여자, ‘할미라는 순 우리말이다.

 

할미의 자는 원래 크다는 뜻의 자가 부르기 좋게 유음화한 소리이다. 하여 노고산은 큰 어머니, 대모(大母)산을 뜻하며 그 대모는 우리민족 태초의 어머니 마고 혹은 마구 할미를 가리키기도 한다. 노고산 역시 마고할미가 돌을 쌓아 만들었다해 그 정상에는 돌탑을 쌓아 그걸 기리고 있다. 그 옆 봉우리가 말 아가리란 뜻의 마구(馬口)봉이라 쓰는 산도 마고할미에서 따온 것일 게다.

 

옛날 옛적 성처녀 마고아씨 하얀 고깔 쓰고 색동저고리 물빛 치마 입고 춤추면 춤사위마다 하늘엔 해와 달과 별도 낳고 땅에는 아들 딸 낳고 들짐승 날짐승 낳고 나무와 풀과 꽃도 낳았나니 삼라만상 다 낳아놓고 흰 버선발 살포시 들어 올렸다 내리며 하얀 만년설 인 천하제일 이 천산과 천지 낳았나니 뭇생명 그렇게 한 태생이니 서로 먹고 먹히지 않고 이슬 지유(地乳)만 어미젖으로 먹고 살며 천수(天壽)를 누리는 성마고 시절 예 있나니.

 

케이블카 타고 지팡이 짚고 오르고 오른 천산 등성이 등성이마다 부는 바람에 아! 하고 탄성을 지르는 저 눈곱만한 꽃, 꽃들 제 스스로 피어나 웃음 지으며 고산지대 짧은 봄여름 본디 생명 구가하고 있는 지천으로 가득한 저 야생화들 바람에 꽃 이파리들 부비며 그 시절 본디로 돌아가라 복본(復本), 복본 하늘거리고 있네.

 

삼국유사에 따르면 옛 기록에 말하기를 옛날에 환국이 있었는데 서자 환웅이 무리 3000명을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열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주해온 환웅 집단이 토착세력과 혼인으로 맺어져 단군을 낳고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

 

이런 단군 이야기를 신화로 치부하고 있으나 그런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남긴 것이 이 고인돌들이며 산 이름들일 것이다. 그런 그들이 남긴 우주 창조 신화가 마고 이야기이다.

 

그들이 내려왔다는 중앙아시아 고원 천산(天山) 천지(天池)에 가보니 산봉우리에 덮인 만년설이 녹아내려 야생화를 키우며 바다 같은 천지를 만들어 위 같은 시 초안이 터져 나왔다. 하늘의 뜻에 따라 뭇생명 널리 이롭게 하려 천산천지에서 내려와 이 살기 좋은 한반도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기에. 가을이 좀 더 익어 가면 고인돌을 지키고 서있는 저 당산나무 이파리들도 차츰 황금빛으로 물들어 제세이화(濟世理化)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그 황금시절로 돌아가라며 출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