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106
내 인생의 책
이장욱
그것은 내 인생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어디서 구입했는지
누가 선물했는지
꿈속의 우체통에서 꺼냈는지
나는 내일의 내가 이미 씌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
살아갔다.
일을 했다.
드디어 외로워져서
밤마다 색인을 했다. 모든 명사들을 동사들을 부사들을 차례로 건너가서
늙어버린 당신을 만나고
오래되고 난해한 문장에 대해 긴 이야기를
우리가 이것들을 해독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영
눈이 내리고 있기 때문
너무 많은 글자가 허공에 겹쳐 있기 때문
(…)
제목이 없고
결론은 사라진
나는 혼자 서가에 꽂혀 있었다. 누가 골목에 내놓았는지
꿈속의 우체통에 버렸는지
눈송이 하나가 내리다가 멈춘
딱
한 문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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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천을 능멸하며 피는 능소화도 이제는 피고지고, 그래도 생은 계속됩니다. 시인은 ‘인생의 책’에 대해 말하고 있네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철학적 명제. 그러나 문학적 명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과연 ‘인생의 책’에 무슨 문장을 적을 수 있을까요. 생은 이토록 수수께끼 같은데 말이지요. 시인은 문득 출몰했다 서서히 사라지는 것들,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과 어렴풋이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맴도는 존재들, 그리고 모호함 속에서야 가능해지는 세계를 건축하고 있습니다. 생각난 듯 ‘꿈속의 우체통’을 들여다 본 자만이 그 책을 펼쳐볼 수 있고요. ‘내일의 내가 이미 씌어 있는 것을 보’는 일은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한 일. 그것대로 일하고 살아가는 일은 그보다 아득하고 아득한 일. 서가에 꽂혀있는 나라는 한 권의 책. 깊은 잠에 빠진 책 속의 문장은 글자들일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한 문장의 전언에 우리 눈동자는 멈추고, 빛나고.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