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갑하다. 이른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습식 사우나에 든 것처럼 후덥지근하다. 이런 더위보다 미세먼지가 더 두려운 날이 계속되고 있다. 숨이 턱, 턱 차올라도 마음 놓고 숨 쉬기조차 무섭다. 아지랑이처럼 노랗게 아른거리며 몰려왔던 봄날 황사와 미세먼지는 근본부터 다르다. 황사가 자연 현상이라면 미세먼지는 인공 현상이다. 우리가 지어낸 유독가스이다.
뿌옇게 앞은 안 보이고 숨쉬기조차 무서워서인가. 먹는 일도 숨 쉬는 일도 고달프니 이 삶 차라리 작파해버리고 싶다는 소리를 많이 듣곤 한다. 천륜과 인륜을 저버리는, 과거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사건들도 많이 일어나고 있고. 숨줄 놓아버려 이런 끔찍한 업(業)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농담 같은 하소연이, 수년 전부터 젊은이들 사이에 터져 나오기 시작한 ‘헬(지옥) 조선’이란 말과 겹쳐진다.
그래 나도 갑갑하다. 그러나 미세먼지 속에서도 허옇게 피어나는 저 파꽃들을 보시라. 도회 조그만 텃밭들에서 기어코 피어나고 있는 저 감자꽃 그 순박한 빛깔들을 보시라. 마지막 자투리 논배미일지라도 물 빵빵하게 채워 넣고 가지런히 심어놓은 저 벼들의 파릇한 농심(農心)을 보시라.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낫다는 말 실감으로 보이실 것이다.
마지막 봄꽃이란 듯 더 붉고 오래 피어나던 철쭉꽃도 다 진 마당이 섭섭하여 둘러보니 모과나무 두터운 잎사귀 사이사이에 모과꽃이 숨어서 피고 있었다. 누가 모과나무 아니랄까봐 아직 어린데도 나무줄기부터 칙칙하다. 퍼렇고 흉측하게 멍든 옹이 가득한 줄기가 까치독사 등허리 같다. 그런 나무에 숨어 피는 저리 조그맣고 예쁜 꽃이라니.
업이란 말이 무섭게 떠올랐다. 힌두교는 물론 불교 등 인도 종교와 사상은 물론 현세의 삶을 뿌리째 잡고 있는 ‘카르마’란 말에서 온 업, 업보(業報).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행한 일이 전생과 후생에 이어지고 있다는 인과관계, 그 윤회의 질긴 끈이 모과꽃을 보며 무겁게 죄어왔다. 그러면서 「모과꽃 필 때」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이 탄식처럼 터져 나왔다.
독사였던가 나는,
퍼렇게 멍든 세월 마디마디 저려오는 이 똬리 튼 옹이들.
섞여들지 못한 세상 또 무엇을 물어뜯으려 곧추세운 모가지더냐.
살모사였던가 나는,
묵은 등걸 어미 옆구리 뚫고 툭툭 불거져 나오는 이 신생(新生)의 잎새들.
잎도 없이 피어난 이른 꽃철 나무라는 패륜의 고고성이더냐.
어린 계집 젖꼭지였던가 나는,
여린 잎새 사이사이 숨어 실핏줄로 맺히는 이 철늦은 꽃망울들.
봄꽃 다 지고서야 또 무슨 죄업 지으려는 연분홍 시그널이더냐.
홍어이련가 나는,
입도 코도 다 문드러지고 나서야 제 맛내는 썩은 홍어이련가.
옹이인지 과실인지 알 수 없는 이 투박한 열매들.
왈칵 물어뜯을 수도 없는 울퉁불퉁한 세월의 진한 향기이련가.
붉은 철쭉꽃 지나 연보라 등꽃 지나 새하얀 찔레꽃 지나
봄 꽃철 다 지나서야 모과꽃 점점 붉게 핀다.
핀다. 잎새 사이사이 숨어 피는 질긴 업보(業報) 이 가련한 기미(幾微)들,
정말 단숨에 줄줄이 써져 교열 차원에서 조금만 손 본 시이다. 다른 시들은 피를 다 말리고 나서야 겨우 한 줄 나오곤 하는데 이리 터져 나온걸 보니 이 업이란 게 우리네 삶 한가운데 항시 이리 낯익게 똬리 틀고 있나보다.
그러니, 그러나 현재와 미래가 아득히 함께하고 있는 이 이승의 순간순간 열심히 살아낼 일일 것이다. 아무리 갑갑하고 독한 세월일지라도 숨줄 놓아버리면 후생 또한 그럴 터이니 순간순간 최선으로 살아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