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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99ㅣ의심하지 않은 죄ㅣ프리모 레비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99



의심하지 않은 죄

프리모 레비


그대는 단지 만년필을 준비하고 기다리면 된다.
그럼 마치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들처럼
새로운 영감이 그대의 영혼과 온몸을 휘감을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재빨리 낚아채기만 하면 된다.
그대는 아직 아무것도 끝내지 못했고
할 일은 많이 남아 있다.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 그것이 그대의 시작이다.
서로 먼저 불빛 가까이 다가가려고 다툰다면
오히려 무질서와 혼란만 불러올 뿐이다.

작가란 얼마나 훌륭한 이름인가.
무려 6천 년이나 되는 오래된 이름이지만
항상 새롭게 태어나지 않는가.
엄격한 자기원칙이 필요하지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늘 자유롭지 않는가.
물론 글이 모든 순간에 필요한 건 아니다.
다만 좋은 벗들과 함께 바람 속을 걷는다는 마음으로
모든 준비를 하고 그대의 명령을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그대 작가들이여,
글을 쓸 땐 부디 ‘의심하지 않은 죄’를 짓지 말라.
이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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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여름, 프리모 레비를 만나볼까요. 잘 알려져 있듯, 그는 치열한 삶의 이력을 살다간 이탈리아 출신의 작가입니다. 토리노대학 화학과를 수석 졸업한 그는, 24살이 되던 해인 1943년 파시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시작하게 되지요. 그러던 중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고 맙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주기적으로 피어오르는 굴뚝의 검은 연기로 요약된다고 증언하였지요. 그는 평균 생존 기간 3개월인 수용소에서 1945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 후 수용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시와 소설, 회고록 등 다양한 형식의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레비는 오늘의 시 ‘의심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오고 있는 ‘시간’에게 그리고 ‘문학들’에게 말이지요.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모든 “작가들이여,/글을 쓸 땐 부디 ‘의심하지 않은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러나 “그대의 시작”에 대한 가능성에 관해서는 의심하지 않기를!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