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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92ㅣ아네모네ㅣ성동혁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92



아네모네

성동혁





나 할 수 있는 산책 당신과 모두 하였지요

사랑하는 이여 제라늄은 원소기호가 아니죠

꽃 몇 송이의 허리춤을 자른다고

화원이 늘 슬픔에 뒤덮여 있는 건 아니겠지만

안 잘리면 그냥 가자

꽃의 살생부를 뒤적이는 세심한 근육을

우린 플로리스트 플로리스트라고 하지

꽃범의 꼬리 매발톱

모종의 식물들은 죽은 동물들이 기어코 다시 태어난 거죠

거기 빗물에 장화를 씻은 사람아

가을의 산책은 늘 마지막 같아서

한 발자국에도 후드득

건조하고 낮은 짐승이 불시에 떨어지는 것 같죠

나의 구체적 애인이여

그래도 시월에 당신에게 읽어준 꽃들의 꽃말은

내 편지 다름 아니죠

붉은 제라늄 내 엉망인 심장

포개어진 붉은 장화

아네모네 아네모네

나 지옥에서 빌려온 묘목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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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의 시인 성동혁. 그는「리시안셔스」라는 시에서 “나는 이 꽃을 선물하기 위해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아네모네’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 그러니까 이별의 말들. 이원 시인은 그의 시에 대해 “얼핏 보면 고요하고 일상적인 풍경이지만, 시를 읽어 나가다 보면 느껴지는 기이한 슬픔에서, 그것이 들끓어 오르는 격렬함을 가라앉힌 손만이 쓸 수 있는 언어임을 알게 된다.”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꽃을 선물하기 위해 살았던 시적 주체. 이제는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서 “엉망인 심장” 소리를 듣는 이. 그 소리를 음악 삼아 읊조리는 것밖에 도리가 없는 시간. 끝내 “나 지옥에서 빌려온 묘목이 아니죠”라고 묻지만 대답의 목소리는 아득한 봄. 물론 “꽃 명 송이의 허리춤을 자른다고 / 화원이 늘 슬픔에 뒤덮여 있는 건 아니겠지”요. 그럼에도 애도. 이토록 눈부신 절기, 투명한 ‘붉음’ 앞에서 아름답게 무릎 꿇는 청춘 한 점.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