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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89ㅣ리라 ㅣ손택수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89

리라

​ 손택수


리라 있지? 고대엔 리라 현을 양의 내장으로 만들었대 내장을 재로 씻어서는 갈기갈기 찢었지 하필 재였을까 잿더미였을까

멀리 독일까지 가서 고고학 공부를 하는 허수경 시인에게 들었다 왜 고국을 떠났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담담하게 시 때문이라고 했다 독하구나, 모국어를 위해 모국을 떠나다니

시인의 말을 받아적은 종이도 독을 삼킨 것이다 종이라면 제지공이었던 유홍준 시인이 생각난다 산판에서 벌목공 일을 할 때 양잿물 마시고 죽으려 길 몇 번, 양잿물 팔자가 어디 가겠노 살다보니 펄프에 양잿물을 타고 있더라 양잿물 마신 종이에 시를 쓸지 누가 알았겠노

말년엔 시 한 편이면 천하 원수도 다 용서가 될 것 같다고 안주도 없이 소주를 마시던 박영근 시인도 생각난다 수전증에 걸린 손으로 술잔을 건네던 그가 나는 꺼림칙했다 손의 발작이 옮겨오면 어쩌나 멀찌감치 떨어져 지냈다

겨울밤 덜덜덜 발작이라도 하듯 모포를 덮고 떠는 창문 옆에서 모니터를 면경처럼 들여다보고 있다 야근을 자주 하면 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데, 위장병과 소화장애 환자가 되기 십상이라는데

무슨 독한 사연도 없이 쓰린 속을 움켜쥐고 누가 시키지도 않는 야근을 하고 있는 시, 몇 십 년 째 밤마다 재가 되어 사라지는 말들을 품고 곯는 내장의 경련을 탄주라도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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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리라’라는 악기 이야기로 출발합니다. 과연 내장으로 만든 악기에서는 어떠한 소리가 들려올까요. 모든 울음이 안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때, 그 소리를 짐작해보는 일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이어서 시인이 들려주는 시인들의 이야기. 사연 없는 사람도 역사 없는 나라도 없겠지요. 과연 오늘날 시인은 누구이고 시는 무엇일까, 라는 문장은 악기 소리만큼이나 비밀로 가득합니다. 잘 빚어진 항아리처럼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그 자체로 우뚝할 뿐, 아름다움의 이유를 설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와 함께 문학이 불가능한 시대의 문학이야말로 가능성으로 가득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문득 ‘재가 되어 사라지는 말들’이 한용운 시인의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알 수 없어요」)라는 구절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나란히.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