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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 가고 오는 세월도 너그러이 품으시길
이경철(시인, 전 중앙일보문화부장)
예년에 비해 올핸 첫 눈이 참 늦었다. 11월 말 들어서야 새벽에 빗속의 눈발, 진눈개비가 관측됐다. 기상청은 첫눈으로 공식 확인했다 밝히면서도 첫눈이라 하기엔 쑥스럽다 할 정도로 미미한 눈이었다.
올핸 첫눈이 참 기다려졌다. 가을이 온산을 단풍으로 환장하게 하더니만 여름에 그토록 목말라 했던 비가 늦가을 내내 내렸다. 가을이면 추적추적 무너져 내리는 마음, 그래서 남자들을 추남(秋男)이라 했던가.
유난히 그런 가을을 타는 내게 올핸 더 심했다. 어머니 여윈 고아의식에, 중년을 넘기는 갱년기에, 추적추적 가을비 내리는 상심의 삼각파도에 마음은 자꾸자꾸 무너져 내렸다. 그래 우울증으로 빠져드는 이 내 마음을 눈이 내려 가을을 끝내고 하얗게 하얗게 덮어주길 바랬는데.
그러다 12월 3일 이른 새벽부터 펑펑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침 초부리 우리 집 베란다에 쌓인 눈을 재보니 벌써 10센티를 넘고 있었다. 이날 전국 곳곳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가운데 종일 함박눈이 내렸다. 앞마당 소나무들이 솔가지에 쌓인 눈을 어쩌지 못하고 부르르 떨며 눈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밤새 저 소나무들 가지 찢어지면 어쩌나, 지금이라도 나가 좀 털어줘야 하지 않나 걱정하다 일어나보니 멀쩡했다. 다음날 해가 따스하게 비추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주니 소나무에 쌓인 눈은 흩어지며 녹아내렸다.
그렇게 의연해지는 소나무를 보며 ‘인자무적(仁者無敵)’이란 말이 실감으로 떠올랐다. 어진 사람은 적이 없나니, 그 인자함을 이내 알아보고 햇볕도 바람도 저 소나무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고 보호하고 있지 않은가. 가을 내내 상심했던 내 마음을 소나무를 바라보며 얻은 인자무적이란 말이 치유해주고 있다.
우울증에 빠지면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적으로만 보인다. 그동안 잘 살아낸 세월도, 너그럽게 잘 봐줬던 사람들도 다 그렇게 보인다. 난, 내 삶은 그렇지 않았는데 하면서도 속 좁고, 적대적으로만 보여 분노조절도 못하고 툭하면 ‘욱’하고 터져 나오는 게 우울증이란다.
잘 다스리고 치유하지 못하면 천하의 인자무적이었던 사람도 편협하고 좀스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우울증. 그런 우울증에서 큰 눈 뒤집어쓰고 위태로웠던 소나무와 눈을 털어주던 햇살과 바람을 보며 난 벗어나고 있다.
초부리 자투리 산야에선 지금 갈대만이 허허로운 눈밭에서 세모로 가는 세월을 견뎌내고 있다. 시린 바람에 서로서로 빈 몸, 빈 마음을 부비며 뭔가를 애타게 기다리며 부르고 있다. 마음이 허전하고 추운 세월의 길목에서 그런 갈대들에게 혈육 같은 정을 느끼며 이런 시를 써 봤다.
별거 아니에요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거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거 별거 아니에요
가뭇없이 한 해가 가고 또 너도 떠나가는 거
별거 아니에요
바람 불고 구름 흘러가는 거
흘러가는 흰 구름에 마음 그림자 지는 거
마음 그림자 켜 켜에 울컥, 눈물짓는 거
별거 아니에요
그런데 어찌 한데요
텅 빈 겨울 눈밭 사각사각 사운거리는 저 갈대
맨몸으로 하얗게 서서 서로서로 살 부비는
저, 저 그리움의 키 높이는 어찌 한데요
해가 또 가고 기약 없이 세월 흐르는 건 별거 아닌데요.
그래, 한 해가 또 간다. 기약도 없이 가는 해는 갈 지라도 우린 그리움만은 놓지 말 일이다. 꿈과 현실이 아리지만 포근하게 만나는, 우리네 삶의 알파요 오메가인 그리움을 놓아버린다면 그야말로 허망하고 우울한 날만 계속될 것이기에. 그리움이 있기에, 만날 기약 있기에 우리는 무정한 세월도 유정하게 살아내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