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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철 시인의 초부리 시첩

11월은 모든 것이 이제 헤어져 각자의 본디로 돌아가는 계절
이경철(시인, 전 중앙일보문화부장)

우리 초부리 초록전원마을에서 용인자연휴양림에 이르는 멀지 않은 길 주변에도 가을걷이가 한창입니다. 가을이 익어갈수록 큰 키에 고개를 더 깊숙이 숙이던 수수 모가지도 댕강댕강 잘렸습니다. 한 이삭만 꺾어 뜸 들이는 밥 위에 쪄 소싯적 통학 길 위에서처럼 한 알씩 까먹고 싶던 수수입니다.

투명한 가을 햇볕에 잘 말라가던 들깨도 수확이 한창입니다. 노부부가 밭머리 양광 아래 앉아 마른 들깨 단을 방망이로 두드리며 그 작은 깨 알갱이를 털어내고 있습니다. 대기 가득 퍼지는 고소하면서도 비릿한 냄새가 피부에 와 닿습니다. 조그만 자투리 땅 텃밭에 가꾼 그 수확물들은 일용할 양식이라기 보단 어쩌면 추억, 마음의 추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또한 그런 마음의 추수를 위해 자연휴양림 산길을 찾고 있습니다. 싸리들국화 그 눈곱만한 꽃만 겨우 피워놓고 땅도 산도 하늘도 햇살도 텅 비어가는 계절. 모든 게 떠나가는 계절 마음 한 자락 붙들려 홀로 산 허리 굽이굽이를 도는 오솔길을 걷고 있습니다.

산길을 걷다보면 잔광(殘光)에 부서지는 산벚나무 단풍 이파리들 그 색색들이 눈에 아리게 들어옵니다. 단풍나무나 은행나무 이파리들 같이 단일 색이 아니고 마치 산사(山寺)의 낡은 단청(丹靑)같은 색소들이 환장하게 아름다우면서도 애잔합니다.

마른 잎 쓸고 가는 바람소리가 찬바람 목덜미 스치는 것보다 서 시립니다. 산 구비 돌때마다 저 먼 산 능선들은 어깨동무하고 아스라이 다정한데 한 나무에서 자란 한 혈육이면서도 이제 뿔뿔이 흩어져 날리는 저 낙엽들이 서럽습니다.

그렇게 애잔하고 서러운 것들이 마음을 한층 여리고 예민하게 하며 가을은 깊어 이제 11월로 넘어왔습니다. 찬비 내리고 강원 산간에는 눈발도 흩날리고 얼음도 얼게 하며 겨울로 가는 길목이 11월입니다. 가을과 겨울이 목 잘린 수숫대처럼 외롭고 쓸쓸하게 선채로 그리움만 출렁이고 있는 달이 11월입니다. 그런 11월의 마음, 이미지들을 아래와 같이 시로 그려 보았습니다.

떠나는 것과 머무는 것 사이.
꼭두새벽 마른 잠 저어가는 귀뚜라미 울음.
마른 수숫대 사이 건너가는 바람소리.
가을과 겨울 사이 투명한 깊이.
해맑은 높이를 나는 고추잠자리 날개.
눈썹 위 부챗살로 퍼지는 빛살 프리즘.

아! 먼 소리와 빛깔들의 예민한 혼선.

저무는 들녘 휘돌아나가는 철길.
기적소리에 흩어지는 억새꽃 허연 홀씨들.
간다는 말도 못하고 떠나는 나그네 혈육들의 시그널.
너와 나 사이 휑한 가슴이 마주보는 11월은,

11월은 모든 글을 이리 경어체로 쓰고 싶은 달입니다. 떠나가는 모든 것들에게 ‘안녕’이란 인사를 간절히 전하기 위해. 그렇습니다. 11월은 이 아라비아 글자 형상처럼 당신과 제가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형국입니다.

아무리 붙잡고 매달리려 해도 때가 되면 팔랑팔랑 떨어져 날리는 저 낙엽들과 같은 계절. 그래 마음 한 자락이라도 붙들고 싶어 이리 당신께 존대어로 편지를 쓰고 시를 쓰고 싶은 계절이 11월입니다.

아, 그러나 이런 가을의 감상도 이제 그만 두어야할 것입니다. 저 팔랑팔랑 떨어지는 낙엽들은 제 휑한 마음에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낙엽을 쓸어가는 바람소리도 제 쓸쓸한 마음에 부는 소리가 아닙니다.

낙엽은 떨어져 제 뿌리로 돌아가며, 바람은 불어 가을을 겨울로 들어서게 하며 우주 운항의 질서를 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각자의 사물들이 보여주는 자연스런 도(道)를 저 나름대로 해석하며 마음 상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1월은 각자가 제 뿌리, 겨울로 돌아가 봄의 소생을 예비하는 계절입니다. 이런 11월에는 우리도 우리들의 뿌리, 마음 본디로 돌아가 이 일 저 일을 우리 나름대로 생각하며 다치고 황폐해진 마음들을 돌봐야 할 것입니다. 때가 되면 떨어져 제 뿌리로 돌아가는 저 낙엽들처럼 탐욕과 집착 내려놓고 청정하고도 든든한 마음 본디로 돌아가야 할 때가 11월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