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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71 l 처서(處暑)라는 말의 내부 l 천서봉

용인신문-시로 쓰는 편지 71


처서(處暑)라는 말의 내부

천서봉


골 진 알밤, 무딘 칼날 세워 보늬 긁는다. 겨의 주름 깊이 길이 나 있다. 더위가 물러가는 길, 길을 따라 또 길이 돌아오는 길.

죽은 할미도 달의 오래된 우물도 모두 내 안구 속으로 돌아와 박힌다. 깊어가는 수심의 습지에서 남보다 더 오래 우는 개구리의 턱이 깊다.

지나간 애인들의 뒤통수가 전봇대마다 건들건들 매달려 있다. 울음소리를 참아온 나무들이 투명한 손바닥을 여름의 뒷등에 비빈다.

앵앵거리는 추억은 다만 비틀어져갈 뿐, 하나도 안 아프다. 그런 모기의 주둥이처럼 저녁이 오고, 한두 겹의 내력을 더 견디며 나는, 고요의 중심으로 천천히 내려가리라.

더위가 물러가는 길, 파르라니 깎은 몇 개의 알밤을 바가지에 담그면 달의 손바닥들이 내 오래된 뇌(腦)를 쓰다듬는다. 서늘한 나의 카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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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處暑)는 여름 더위가 그치는 날. 입추와 백로 사이의 절기이지요. ‘처서가 지나면 풀도 울고 지나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에는 어떠한 처서가 그려지고 있을까요. 제목이 ‘처서라는 말의 내부’이니 더욱 기대가 되지요.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것, 이토록 자연의 이치는 자명하기만 합니다. 우리는 지나간, 그러나 아주 지나가지 않은 그 무엇을 추억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의 첫 시집『서봉氏의 가방』시인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담겨있습니다. “세월이란 것이 겨우 몇 개의 목차로 요약된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아마도 이 책의 대부분은 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탕진의 그 방대한 여백만이 시의 몸이 되었으니 지금 더듬을 수 없는 것만이 다시 희망이 될 것이다.” 이처럼 가을의 대기는 여름이 불러온 탕진 이후의 ‘방대한 여백’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곧 잘 깎아 놓은 알밤 몇 알을 만지며 생각에 빠질 우리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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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