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09 (월)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이경철 초부리 시첩

   

갈등 많은 이 세상, 질기게도 예쁜 꽃
                                                이경철(시인, 전 중앙일보문화부장)

동틀 기미조차 없이 캄캄한 하늘, 별들이 반짝인다. 온갖 풀벌레소리도 별처럼 반짝거린다. 이어지는 열대야에 뒤척이는 새벽, 피부에 와 닿는 서늘한 대기 속엔 분명 가을이 들어와 있는데, 아니다.

입추 지나고 말복 지나 절기상으론 가을 문턱을 넘어섰는데 이 땅덩어리가 식을 줄 모른다. 식기는커녕 하루는 건식, 하루는 습식 사우나 더위가 지구를 점점 더 덥히고 있다.

사계절로 만물을 낳고 기르고 거두고 저장하는 우주 운항원리인 절기와 인간의 이기(利己), 오기(傲氣)가 초래한 지구 온난화 사이의 갈등이 땀만 주르르 짜내는 형국이다. 사람이든 무엇이든 가까이만 붙어도 피부는 예민하게 갈등하는 짜증나는 더위이다.

더위에 지쳐 만물이 시들거리는 이 염천(炎天) 속에 칡덩굴만 울울창창 뻗어나가고 있다. 길바닥을 기기도 하고 철책과 나무를 오르기도 하면서 이 땅과 공중을 점령해나가고 있다.

그늘 아래를 거닐며 칡덩굴 여린 순을 따 껍질을 벗기고 씹어본다. 입 안 가득 쌉쌀하게 번지는 초근목피(草根木皮)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그 허기. 뻐꾹, 뻐꾸기 울음에 보리모가 누렇게 익어가던 보릿고개 시절의 허기가 칡덩굴 맛에는 여직도 까칠하게 들어있다.

그렇게 칡덩굴 순을 따 씹으며, 칡덩굴을 발로 차며 걷다 고개 들어 나무 위를 보니 우중충하게 풀죽은 나무 가지마다 홍보석 꽃 세상이다. 석류 알갱이 같은 꽃들이 층층이 꽃 탑을 쌓아올리고 있다.

그냥 지나쳐버리곤 했던 칡꽃이 이 짜증나는 더위 속에 뭔가 환하게, 살맛나게 들어왔다. 저 볼품없고 성가시고 하찮았던 칡덩굴과 칡꽃이 달착지근한 향내로 내게 다가왔다.

매미가 울어도 실바람 불어도 짜증나는 삼복더위 칡덩굴만 제 세상 만났다 발길에 채이고 짓이겨지면서도 뱀같이 징그럽게 땅바닥 벌벌 기며 꽃을 피우고 있다 넘어오지 말라는 철책도 기어올라 꽃피우고 제 꽃 제대로 피운 듯 만 듯 우중충한 소나무며 층층나무 가지가지 기어올라 멋들어지게 꽃피워준다 제 꽃철 제대로 만나 온 세상 환하게 피우다 그만 까칠해진 아카시아 나무도 타고 올라 미진했던 꽃세상 더 달착지근하게 열고 있다 꽃 위에 꽃, 꽃, 꽃 홍보석 꽃탑 쌓아올리고 있다 무시도 치욕도 인연도 아랑곳 않고 무작정 뻗어나가 보듬고 함께 꽃피워 내고야마는 저 모질게도 환한 꽃, 꽃, 꽃 튼실한 꽃탑이여!

그런 칡덩굴과 칡꽃을 일단 이렇게 정리해봤다. 싫대도 자꾸만 엉겨 붙고 기어 오르는 칡덩굴의 끈질긴 생명력, 포옹력이 행을 나누지 않고 이렇게 줄글, 산문시로 나가게 했다.

그런 칡덩굴을 바라보면 누군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려봅세”라는 고려 말 이방원의 시조「하여가」가 떠오를 것이다. 이 시에 대한 답으로 정몽주의「단심가」“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는 구절도 떠오를 것이고.

조선 태조 이방원의 ‘화해’와 고려 말 충신 정몽주의 ‘절개’의 가치는 차치하고 내 마음, 더위 속 짜증 같은 우리 사회의 갈등을 해소시켜보려 산문이면서도 운문 같이 운율을 살려내려 했다. 우리말의 자연스런 발걸음에서 나오는 시조 음보율(音步律)을 취하려했다.

산문은 직선적, 발전론적으로만 나가는 근대적 글쓰기 양식이다. 이에 비해 운문은 원형적, 반복적으로 나가는 우주운항 질서와 같은 본원적인 글쓰기이다. 그래서 운문의 생명인 운율은 우주운항의 질서이고 때문에 우리 삶의 양식일 터인데 요즘 우리 일상과 현실은 그런 운율을 잊고 너무 직선적, 산문적으로만 나가 이리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게 아닌가.

갈등(葛藤)이란 나쁜 말의 어원이 된 저 칡덩굴. 그러나 아니다. 상대가 무시해도, 싫어해도 무작정 껴안아 들이려하는 칡덩굴에는 죄가 없다. 그것은 갈가리 찢겨 서로 반목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이 험악한 우리 사회에는 분명 덕목일 것을.

그대 향한 내 마음 몰라준다고 토라지는 이 내 마음 속 애증의 갈등. 아, 부질없어라, 좁고도 좁아라하며 무조건 기어올라 기어코 인연을 꽃 피워내고야 마는 저 칡 꽃, 꽃, 꽃들의 탑. 갈등도 많고 한도 많은 이 세상 모질고도 질기게 싸안으며 환하게 피어오르게 하는 칡덩굴, 칡꽃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