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바닥만 한 하늘에서 별 헤는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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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잠깐, 먼동이 터오는 기미가 보이자 별은 사라지고 하늘 가득 흰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12월로 들어서자마자 첫눈이 함빡 내려 계절은 이제 정말로 겨울로 들어갔다. 달력의 이 정확함이라니. 촐싹대는 기상예보보다는 아무래도 더 의젓한 이 우주 운항의 순리라니.
이곳 초부리로 이사 와서는 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둑해지면 이제 별들이 나왔겠거니 하늘을 쳐다보고 잠자리에 들 땐 얼마나 초롱초롱한가 들여다보고 새벽에 일어나 중천에 뜬 별자리들을 그려보는 재미. 아니 재미라기보다는 이제 별을 헤아리는 것이 한 의미가 돼가고 있다.
처음엔 야산에 둘러싸인 좁은 하늘이 답답했다. 넓은 곳에서 보면 달과 별들이 저 하늘 높이, 광활하게 떠있고 펼쳐져 있는데 이 손바닥만 한 공간이라니. 그러던 어느 컴컴한 그믐밤 내내 달을 쳐다보며 차를 타고 대처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 그런데 저 멀리 하늘 높이 떠 실낱처럼 사라져가던 그믐달이 우리 동네에선 산허리에, 바로 내 눈썹 위에 튼실하게 걸려있는 것 아닌가. 아니 내 마음속에서 떠오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때부터 이 손바닥만 한 하늘의 달과 별들은 저 먼데 것이 아니라 마치 어릴 적 내 동무, 혈육처럼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늘마저 얼어붙어 명징한 겨울에는 별들도 더 총총 빛난다. 새벽이라 더 찬바람에 온몸과 마음도 더 시려 별들은 더욱 혈육처럼 따뜻하게, 애틋하게 다가온다. 며칠 전 새벽 눈비구름에 살짝 젖었는지 금시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별들을 헤아리다 ‘울고 있니?’라는 말이 나도 몰래 터져 나왔다.
구름에 가려 띄엄띄엄 별자리 집도 제대로 못 이룬 별 혈육들이 너무 짠해서일까. 한참 그런 별들을 들여다보며 시상을 가다듬고 가다듬다 일단은 아래와 같은 시구절로 정리해봤다.
탯줄도 못 끊고 간
내 동생 봐야겠다.
보릿고개 쉰 감자 먹다
숨넘어간 어린 동생들 봐야겠다.
보채고 있니? 울고 있니?
눈물 초롱초롱 새벽별들아.
이렇게 써놓고 보니 라다크에서 본 별들이 떠오른다. 옛 티베트 땅이었던 히말라야 산록 해발 3500미터에 위치한 라다크의 한 명상센터에서 보름간 머문 적이 있다. 낮에는 밟으면 금세 흙으로 부서져 내리는 바위산을 도마뱀처럼 오체투지로 기어올라 토굴에서 명상하다 밤이면 합숙소로 내려와 자는 일정이었다.
워낙 고산지대라 산소가 희박해 잠들면 그대로 깜빡, 숨길이 끊길까봐 무서워 잠 못 자고 밤새 옥상에 올라가 별들만 쳐다봤다. 한밤중 적막 속의 히말라야 산자락에는 오히려 온통 소리, 소리뿐이었다. 티베트 오방기 펄럭이는 소리, 풍경(風磬) 소리, 만년설 녹아 흐르는 계곡물 소리, 맨땅 흙부스러기를 쓸어가는 바람 소리…….
그런 소리들에 귀를 열고 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별들도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 바로 위 하늘 가득 총, 총, 총 떠있는 별들이 내 눈 속으로 별똥별 되어 무수히 떨어지며 뭔가를 애타게 묻고 있었다. 대체 뭘 묻고 있는 거니? 헤아리고 헤아리며 눈과 귀를 기울이니 마지막 날 새벽 그 소리가 뚜렷이 들려왔다.
“형, 형아. 나 언제 다시 별로 떠오를 수 있는 거야?”라고. 그래 나는 지체 없이, 뚜렷하게 소리 내어 말해주었다. “응, 그래. 곧 다시 별로 떠오를 거야. 돌이 됐다, 흙이 됐다, 꽃이 됐다, 말똥이 됐다, 물이 됐다, 구름이 됐다 한세상 잘 살며 돌고 돌다보면 반드시 넌 별로 다시 떠오를 거야. 왜? 넌 원래 별이었으니까”라고.
그렇게 별똥별한테 대답하고 나니 나도 별들과의 명상으로 뭔가 한 소식하고 돌아간다는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주의 본체는 무엇이고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가 어렴풋이 잡히는 듯도 했다. 끊임없이 흐르는 윤회전생(輪廻轉生)이 삶이요, 하여 본체는 없고 몸 바꾸어 끊임없이 변하게 하는 것, 형체 없는 바람이 우주의 운항 질서 아닐까하고.
아, 그러나 아서라. 우리네 생생한 오늘의 삶을 딱딱하게 굳혀버리는 허깨비 같은 관념이여! 우주 삼라만상과 살갑게 어우러지는 이 생생한 기운을 차단하는 아집(我執)에서 헤어나려 나는 오늘도 별을 헤아린다.
일 많고 난관 많은 한 해를 또 술로 허겁지겁 보내는 연말, 망년(忘年) 시즌이 됐다. 이렇게 허겁지겁 취생몽사(醉生夢死)로 보내고, 잊어야 좋을 것이 한 해 한 해의 세월은 정녕 아닐지니. 기뻐하고 아파하고 간절히 그리워하며 우주의 뭇생령이 어떻게 끝끝내 어우러지고 있는지의 내력을 저 별들이 총, 총, 총 새기고 있지 않은가. 우주창생과 함께하는 우리네 삶의 가없는 깊이와 영원을 위해 가끔 별들도 한 번씩 쳐다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