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에서 예를 처음 말한 사람은 공자가 아닌 유자다. (논어 학이 1-12) 스승을 닮고자 각고의 노력 끝에 외모부터 스승을 닮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리틀 공자’로 불렀다.
반면에 비토그룹이 생겼다.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예기 단궁하4-24)가 그 선봉이고 증자가 돌격대장 이다.(맹자 등문공상5-4허행12줄) 음양오행에 예는 불이고 안회는 물이다. 안회는 예라는 말조차 입에 담지 않는다. 물과 불은 상극이므로 신체발부 수지부모 정신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가 뭡니까. 가 아닌 인仁이 뭡니까? 라고 에둘러 묻는다.(논어 안연 12-1) 그 이면에는 유자의 척(?)하는 콧대를 꺾어 보자는 속내를 모르지 않는 공자는 인(仁)을 예(禮)로 답한다. 예에 대한 전고(典故)는 주역 34번 괘 뇌천대장(雷天大壯)괘에 “예가 아니면 밟지 않는다.”는 비례불리(非禮弗履)다. 이를 극기복례(克己復禮)로 해석하면서 사물잠(四勿箴)을 만들어냈다. (<左傳> 昭公 12年. 仲尼曰 古也有志 克己復禮 仁也.)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비례물시(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비례물청(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비례물언(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 비례물동(非禮勿動). 이를 국시(國是)로 승화시켜 국격(國格)으로 끌어올린 인물이 조선 최대 당쟁가요 당쟁의 희생양으로 사라진 은진 송문의 우암(尤庵)선생이다. 우암은 화양계곡 암서재(巖棲齋)에서 공부를 했는데 고개 들어 시선이 가장 편하게 머무는 곳쯤인 건너편 바위절벽에 비례부동(非禮不動)을 각자해놓고 자신을 수기(守己)했다. 학문의 초급이 몸을 닦는 수신(修身)이다.
법정스님 한경직 목사 김수한 추기경이 이에 속하고, 중간경지가 닦은 몸을 지키는 수기(守己)이다. 공자 석가 달마 성철이 이에 속하고, 남에게 베푸는 수양(修養)이 학문의 최고 경지이다.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준 예수가 이에 속한다. 공자보다 44세 어린 자하(子夏)는 예수의 이런 죽음에 독특한 해석을 내놓는다. 수왈미학오필위지학의(雖曰未學吾必謂之學矣).비록 배움은 없어도 나는 그런 사람을 반드시 배웠다고 하겠다.(논어 1-7) 죽은 자는 산자의 눈을 뜨게 한다. 예수의 죽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판에는 함량미달 용량초과의 예의 없는 것들이 서로 용이 되겠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목에 핏대를 올린다. 그 한 복판에는 대선출마 선언도 하지 않은 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 鼠一匹)의 백면서생도 있다. 세상은 그를 아픈 청춘들의 메시아라 부른다. 무례의 값은 가혹한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