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에는 무수리에서 왕의 어머니가 된 숙빈 최씨의 묘역인 소령원을 비롯해 현모양처로 유명한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한 사람은 천민 출신이고, 한 사람은 귀하게 자라난 양반댁 규수로서 상반된 출신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위대한 아들을 낳은 훌륭한 어머니로 당당하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최근 용인문화원 역사 기행에서 파주를 찾았을 때 두 곳을 모두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다.
지금은 모두 옛 사람들이 돼 말없이 잠들어 있는 두 여인의 묘역 앞에서 왠지 모를 숙연함이 느껴졌다.
숙빈 최씨는 드라마 동이로 인해 세상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특별하게 관심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알지도 못했던 후궁에 불과하다.
숙빈최씨에 대해서는 최효원의 딸로 7세에 궁에 들어갔다는 외에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 간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왕의 얼굴도 쳐다볼 수 없는 천한 신분이었다던 무수리가 한 나라의 왕의 어머니가 되었고, 현재 왕릉 못지않게 잘 꾸며진 명당 소령원에서 그의 곡절 많은 삶을 보상 받듯 곱게 잠들어 있으니 역전의 삶을 살다간 여인임에 틀림없다.
무수리의 아들로서 평생 콤플렉스가 있었을 영조는 생전에 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셨고, 어머니 사후에는 묘를 원으로 승격시킨 것은 물론 묘역 조성에도 정성을 쏟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갈하고 청아한 묘역에 어머니를 존경하는 아들의 애틋한 사랑이 흐르는 듯 하다. 그러나 비석에 새겨있는 후궁 숙빈 최씨라는 글씨가 옥에 티처럼 눈에 들어오면서 당시 후궁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 넣어야 했던 영조의 남모를 아픔이 전해온다.
숙빈 최씨는 장희빈과 동시대 인물로 둘 다 숙종의 여인이다. 숙빈 최씨는 사려 깊고 신중한 성격이었던 데 비해 장희빈은 투기가 강한 사나운 성정의 여인이다.
숙빈이 영조의 형을 임신했을 때 장희빈이 고문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지만 영조를 잉태 했을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숙빈의 맑고 깊은 마음은 그 모든 힘든 상황을 훌륭하게 견뎌내고 영특한 영조를 낳게 되었으니 마음을 잘 다스린 태교를 한 어머니었으리라 짐작할 따름이다.
숙빈최씨는 49세에 생을 마감했는데,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도 거의 비슷한 나이인 48세에 세상을 떠났다.
율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자운서원 자운산 자락에 율곡 일가의 가족묘가 조성돼 있는 가운데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신사임당 부부의 합장묘가 모셔져 있다.
아들의 묘보다 아래쪽에 모셔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율곡이 대 학자였기 때문에 위쪽에 모셔진 것이라고 한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만 실은 현모양처라는 명칭은 사임당 사후 100년이 지난 17세기 중반 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사임당 생존 시에는 산수화를 잘 그리는 화가였다. 그러던 것이 그녀 사후 송시열이 율곡을 낳은 훌륭한 어머니로 칭송하면서 부덕과 모성의 상징이 됐다.
그 후 오늘날까지 훌륭한 태교와 교육을 실천한 현모양처로 칭송되고 있다. 양처였는지는 잘은 모르겠지만 태교를 잘 했다고 전해짐은 미화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시서화를 통해 훌륭한 태교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을 모으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물론 다양한 예술 행위는 훌륭한 태교의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남긴 초충도 같은 그림을 보면 일반인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작은 곤충과 생물 하나하나에도 섬세한 사랑의 눈길을 보냈음이 대번에 느껴진다.
파주에는 그밖에도 용미리 석불입상이 남아있다. 자연석을 이용해 만들어진 거대한 한쌍의 석불은 아이를 바라는 사람에게 자손을 보내준다고 전해지면서 자식의 점지를 기원하는 많은 여성들이 찾는다.
자식을 낳기를 소원하는 간절한 어머니의 마음은 자식이 건강하고 총명하기를 바라는 태교로 자연스레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