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왕따로 자살하는 사건들을 접하면서 어머니 뱃속에서의 태교도 중요하지만 태어난 후 사회라는 태중에서의 제2의 태교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평생을 사회라는 태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태중이라 함은 어머니 자궁에 처음 잉태됐듯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사회 관계와 조직에 새롭게 잉태된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늘 새로운 만남의 연속인 사회에서의 삶이 어머니 뱃속처럼 아늑하고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평생을 살아가는 사회라는 테두리는 어머니의 자궁속 같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서로 돕고 이해하는 배려와 인정이 있는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임신부가 아기의 아름다운 인성을 위해 옳은 생각 하고 옳은 말만 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고 들려줬듯이 사회에 태어난 아이들을 위해 올바른 인성을 심어주는 제2의 태교가 이뤄져야 한다.
사주당이씨는 태교신기에서 “아이가 성장한 후의 책임은 스승에게 있다”고 했다.
유태인들은 교사를 진정으로 나라를 세우고 지키는 자라고 했다. 지식과 지혜를 가르쳐 살아있는 혼으로 민족의 심장을 뛰게 하는 자라는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도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단순하게 지식만을 전하는 스승이 아니라 지혜로운 각성이 있는 스승으로부터 지와 덕을 배우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환경이 많이 변했다. 현대 사회는 물질적인 풍요에 반비례하게 불안 초조 저항 소외 고독 등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이 늘어난다.
이제 이런 정서적 치유마저 스승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온전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교육, 즉 전인교육을 위해 과거의 스승들이 지녔던 학식과 덕망을 두루 갖춘 전인적인 스승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할 스승을 희구할 게 아니라 그보다 먼저 이 사회의 어른들 모두가 책임감을 느끼고 반성하고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발 앞서 태어나 무질서와 폭력이 난무한 세상을 만들어 놓은 우리 모두가 뉘우치지 않는 한 악은 되풀이 된다.
뱃속에서 애지중지 했던 아기가 태어나서 울고 보챈다고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 다섯 살 난 딸에게 돈 가방을 훔쳐오라고 시킨 엄마, 아기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아기를 때리는 보육교사, 학교 교사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세상에서 판단력이 미흡한 아이들이 처음 배우는 것은 폭력과 비행이다.
폭력 게임과 폭력 만화를 만들어 파는 것도 상술에 눈먼 어른들이다. 아이들이 성인이 된 세상은 불을 보듯 뻔하다. 우리는 부모의 자격, 교사의 자격, 어른의 자격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우리에게 관계만큼 중요한 게 없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올바른 관계를 위해 올바른 심성을 갖도록 본보기가 되고, 가르쳐야 한다. 공자는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고 했다.
즉 남을 불행하게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내가 이루고자 하거든 남도 이루게 하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남을 행복하게는 만들어주지 못할망정 남을 불행하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고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연이은 왕따 자살에 경찰은 학교폭력 안전 드림팀을 운영한다고 한다. 우선 시급하게 드림팀을 운영해야 하지만 보다 근본적이고 장기적으로는 우리 모두 거듭나야 한다.
혹시 남에게 당하지 말고 남을 이겨야 한다고 아이들한테 주입시키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보면서 진정한 드림사회를 만들도록 각성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