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토담과 어울리는 붉은 보랏빛의 과꽃과 맨드라미의 유혹을 당해본 사람이 있나요. 요즘 집 앞에 어머니가 심어놓은 탐스러운 꽃들을 보면서 매일 아침마다 마음이 꽃으로 물드는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어요.
반짝반짝 빛나는 아침 햇살이 꽃잎에 스며들어 꽃잎이 환하게 빛나고, 꽃물이 들은 햇살이 내 마음에 일렁입니다.
꽃들에게 “나갔다 올게”라는 인사말이 무심코 튀어나와요.
신사임당의 초충도 가운데 맨드라미와 개구리를 그린 그림이 떠오릅니다. 뛰어난 그림솜씨를 가진 신사임당은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맨드라미꽃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던 듯싶습니다.
얼마 전 강릉에서 보았던 오죽헌 초입에 심어져 있던 맨드라미는 신사임당이 보았던 바로 그 맨드라미일 것 같습니다. 나도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고 말았습니다.
꽃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그림으로 옮긴 아름다운 태교를 했을 신사임당을 떠올리면 율곡 이이 같은 아들이 어떻게 태어난 것인지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사주당이씨는 꽃을 보는 여유 보다는 한글자라도 더 많은 경서를 읽는 데 시간을 쏟았을 것을 짐작해 봅니다.
그의 아들 유희 역시 천재로 태어났지만 어머니 뜻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지 않아 어머니 이씨와 함께 그다지 유명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요. 아들과 남편의 출세는 곧 어머니와 부인의 출세에 다름 아니었던 시대였으니까요.
가을을 여유롭게 걸으면서 한껏 태교를 하는 옛 여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우리 주변에서 아름다운 것을 보는 일은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갖고 주변을 살펴보면 뱃속의 태아랑 함께 즐거워 할 풍경들이 많이 펼쳐져 있으니까요.
정 볼 것이 없다고 생각이 들면, 잠깐 고개를 들어 유난히 푸르른 높은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흰 구름을 보세요. 하늘에서 흰 구름을 타고 온 가을이 미소 짓고 있어요.
며칠 전 추석 특집으로 KBS에서 방영된 꽃담의 유혹에 많은 사람들이 반해버렸다고 합니다. 조상들의 뛰어난 미적 감각에 마음이 절여오기까지 한다고 하네요. 꽃담을 쌓은 투박하고 거친 손길에서 피어난 고운 꽃 그림들이어서 더 그러한 것 같아요.
작가는 꽃담이 말을 건다고 했습니다. 정말 꽃담이 소곤거리는 듯 소박하면서도 정겨운 모습에 잠시 마음이 설렜습니다.
구중궁궐의 정제된 담장에 수놓아져 있는 십장생 그림도 있고 다져진 흙 위에 돌을 촘촘히 쌓아 올리고 그 위에 기와로 물결무늬를 만들어 바람에 일렁이는 듯 한 모습을 담은 담장도 있습니다.
가까이 모현면 갈담리에 한번 가보세요. 시골 전경이 아름다운 마을에는 예쁜 돌담이 그림처럼 동네를 수놓고 있어요.
멋과 여유를 즐기던 조상들의 유전자가 꽃담을 타고 유유히 오늘을 거쳐 내일로 이어지기를 바래봅니다.
수원 농고 담장을 보면 꽃담은 아니지만 높은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안과 밖이 하나가 되려고 한 마음을 읽게 됩니다.
원래 담장 안에 심어져 있었을 푸른 잔디와 나무가 마치 동네 사람들의 산책로 같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원처럼 다가옵니다.
수원시청 담장도 마찬가지에요. 벽돌로 견고하게 쌓아올렸던 담장들을 거둬내고 나무와 작은 정자로 소통의 꽃담을 만든 거예요.
혹 마음에 높게 쌀아 올린 장벽이 있다면 오늘 힘차게 걷어내보세요. 바깥세상이 한 눈에 들어오면서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이 느껴질 테니까요.
아니면 마음에 나지막하고 귀여운 토담이나 돌담, 조금 더 여유가 있다면 예쁜 꽃담을 쌓아보세요. 경계를 지으려고 쌓는 담이 아니라 바깥세상과 이야기를 나누고 호흡을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정겨운 담장을 말이에요.
이런 예쁜 꽃담을 뱃속의 태아와 함께 보면서 예쁜 대화를 나눠보세요. 꽃 그림을 설명해주고, 하늘에 떠있는 흰 구름도 설명해 주세요. 노랗고 붉게 물들어 가는 가을 단풍도 이야기 해 주고요. 아기가 방글방글 웃는 모습이 귀엽지 않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