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24년(1800)에 완성된 태교신기는 일제시대인 1932년에 일본어로 번역돼 일본 여자 중고등학교 교과서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태교신기가 1966년에서야 한글로 해석돼 출판됐지만 그후로도 수십년이 지난 요즘까지 여전히 태교신기라는 제목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더 많다.
이사주당이 태교신기를 지은 것은 우리나라에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
태교신기 서문을 쓴 신작은 “경전에서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채택해 책을 엮어 남기려는 뜻으로 먼저 미묘한 이치까지 통달하셨다.
대체로 임신부의 마음가짐과 행실, 보고 듣고 거처하고 먹는 음식 등의 절도는 모두 경전의 예법을 참고하여 몸소 모범을 보이시고 성현들이 쓴 책을 종합해 거울로 삼으며 의학의 이치를 참작하고 깨우쳐 미묘하고 심오한 이치를 책으로 엮으셨다”고 했다.
이 책이 태교에 대한 최고의 지침서임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는 또 “모든 여인들이 항상 소지하여 모두 보게 하고 임신부가 엄숙히 행한다면 본받아야 할 교훈이 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
또한 발문을 쓴 권상규는 “일찍이 태교신기를 왕에게 바쳐 국가가 서관에서 인쇄해 세상에 펴서 넓게 보게 함으로써 천하를 가르쳤다면 어찌 낳아 기른 자식 중에 다소의 준걸과 영웅을 얻지 않았겠는가”라고하여 아쉬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비문 등을 통해 태교신기의 존재를 알다가 십 수년만에야 간신히 태교신기를 입수한 정인보 선생도 “그 강론이 지극히 밝고 살핌이 세밀해 옛날부터 말한 태교가 이에 이르러서야 한권의 책을 이루게 되었으니 이는 수 천년동안 없던 바이다.
이 책의 내용은 서양 우생학자들의 말과 견주어 보더라도 태교의 근원은 막힘없이 통하는데 조심해서 혈을 다스리니 우생학자도 이에 미치지 못할 바이다. 진실로 널리 행하여 많은 사람이 태교의 말씀을 본받게 한다면 준걸들이 집집마다 태어나게 되리라”고 하였을 정도다.
그런데 우리는 이같이 귀한 책을 활용하지 못한채, 혹은 있다는 사실을 알 지도 못한채 200여년 세월을 무심히 흘려보냈다.
우리와 달리 일본 사람들은 태교신기가 귀한 책임을 한눈에 알고는 일본으로 가져가 일본말로 번역해 일본 여자 중고등학교 교과서로 사용했다 하니 허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 준걸과 영재가 끊이지 않기를 소망하며 지은 책이건만 엉뚱하게도 36년간 우리나라를 지배하고도 모자라 여전히 독도가 자기네 나라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에서 가져다가 일본 여성들의 필독서로 읽혔으니 이사주당이 지하에서 얼마나 통탄할까를 생각하면 후손으로서 면목이 없다.
이사주당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다.
신사임당은 우리 귀에 익숙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이사주당은 여전히 낯설다. 성은 이씨요 사주당은 당호이다. 신사임당이 신씨 성에 당호가 사임당이듯 말이다.
사주당은 중국 남송의 대학자 주자를 스승으로 삼는다는 뜻이고, 사임당은 태교의 효시로 알려진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스승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사주당이라는 말이 사주팔자 같은 말이 연상돼 뭔가 무속적인 느낌이 든다며 이름을 바꾸면 좋지 않겠냐고 까지 한다.
물론 이사주당에게는 희현당이라는 당호가 하나 더 있기는 하다. 어질기를 바란다는 의미의 당호이다.
그러나 태교신기를 저술한 이사주당은 주자를 스승으로 삼아 평생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배운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오면서 태교신기 역시 이사주당이라는 이름으로 펴내셨다.
이는 일본해를 주장하는 일본에 대항해 조선해라는 고유 지명을 놔두고도 방위 개념에 불과한 동해를 부르짖는 것과 뭐가 다른가.
혹자는 이씨 후손도 아니고, 그 아들인 유씨 후손도 아닌데 기념사업회는 해서 뭐하느냐고 하기도 한다.
혈연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
태교는 국가 차원의 매우 중요한 사안이면서 동시에 이사주당이라는 태교의 어머니가 우리 조상이라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인정 받는 것이다.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