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라 불리는 김영삼정부가 막 취임한 1993년 3월. 당시 한국일보 시경캡이던 나는 하루하루를 거의 뜬 눈으로 지새야했다. 시경캡이란 각종 사건을 다루는 사건기자의 팀장을 일컫는 언론계의 용어다. 30여년을 지속해온 군부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 들어선 김영삼정부는 출범부터 의욕적인 사회개혁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런데 문민정부가 시동을 건 개혁의 시동은 정말 엉뚱하게도 언론으로부터 불이 지펴졌다. 새 정부가 발표한 신임 각료들에 대해 언론들이 경쟁적으로 인사검증보도에 나선 것이다. 언론의 인사검증 경쟁은 ‘깨끗한 정부, 깨끗한 사회’를 기치로 내건 문민정부의 실체를 해부해보겠다는 언론인들의 직업의식과 오랜 시기동안 정부로부터 억압받아왔던 언론인들이 모처럼 주어진 언론자유를 향유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가세함으로써 더욱 치열해졌다.
한 신문이 맨 먼저 김상철 서울시장(당시는 서울시장이 임명직이었다)의 부동산 투기의혹을 제기했다. 김상철이 누구인가. 내로라하는 인권변호사 출신인데다 40대라는 참신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정부 출범 조각의 하이라이트로 내세울 만했다. 하지만 그는 서울근교에 위치한 수려한 전원주택이 그린벨트를 무단 훼손해서 건축된 사실이 언론보도로 드러남으로써 1주일만에 사퇴했다. 역대 서울시장 가운데 최단명이었다.
김 시장의 낙마를 계기로 언론들은 새 장관들에 대한 인사검증에 전력을 다했다. 기자들은 특히 한국인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부동산투기를 비롯한 재산형성과정의 투명성과 병역과 이중국적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파헤치느라 산으로 들로, 복덕방으로, 등기소로, 동사무소로 헤매고 다녀야했다.
그 결과 박희태 법무부장관과 박양실 보사부장관 등이 사실상 경질성 사퇴를 해야만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인사검증이 잘 이뤄지지 않은 사실을 시인하면서 “명예와 부를 동시에 가지려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유명한 명구를 남겼다.
문민정부 초기 개각의 이 같은 언론발 인사검증사태를 계기로 대규모 개각이 이뤄질 때마다 언론의 정밀한 검증 잣대가 들이대졌고, 국민들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혐의점이 있는 경우는 본인이 중도사퇴하거나 경질당하는 관례가 생겼다. 최근에는 대학교수 출신들에게는 ‘논문표절’이나 ‘이중게재’ 등과 같은 논문검증도 더해졌다. 이 같은 전통은 이춘호 여성부 장관, 남주홍 통일부 장관, 박은경 환경부 장관 내정자들이 땅투기 혐의 등이 드러나 자의반 타의반 사퇴함으로써 이명박정부 초기까지 그럭저럭 이어져왔다.
하지만 이 같은 관습법은 최근에 접어들수록 사실상 사문화하고 있다. 이젠 땅투기 차원이 아니라면 위장전입은 문제가 되지 않는데다 자녀의 이중국적 문제도 그리 큰 흠결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다.
12일 열린 이인복 대법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서도 예의 위장전입이 논란이 됐다. 이 후보자는 2007년 9월 분양된 경기 용인시 수지구의 아파트 분양 자격 1순위를 얻기 위해 서울 성북구에 살면서도 2006년 8월부터 15개월 동안 용인으로 주민등록을 옮겼다.
이 덕에 63평형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이 사실을 추궁당하자 이 후보자는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잘못을 인정했다.
주민등록법상 위장전입은 3년 이하의 징역형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게 돼 있다. 야당의원들의 거듭된 공박에 이 후보자는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투기목적이 아니라 노령인 부모를 모시고 살 넓은 아파트를 분양받기위한 편법이었다”며 끝내 후보직 사퇴는 표명하지 않았다. 위장전입은 이전에도 정운찬 총리, 이귀남 법무부장관, 김준규 검찰총장, 민일영 대법관, 임태희 노동부장관 등도 문제가 됐었으나 그냥 넘어갔다. 하기는 이명박 대통령도 위장전입 전력이 있는 처지이니 문제시된 장본인들이 “억울하다”며 버티는 게 무리는 아닐 터이다.
하지만 대법관이나 법무부장관, 그리고 검찰총장 등 이른바 법을 다루는 직책의 경우는 누구보다도 엄정한 검증이 이뤄져야한다. 다소 억울해할 터이지만 이인복 대법관도 사퇴하는 게 마땅하다.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사회가 진짜 ‘국격’을 갖춘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