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09 (월)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퀴즈 2관왕에 오른 어느 이발사의 쾌거

어릴 적 고향동네에서 한곳밖에 없던 이발소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는 멋진 헤어스타일로 머리를 가꾸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시절이어서 이발소는 머리가 덥수룩한 어린 학생이 순식간에 까까머리로 환골탈태하는 ‘마법의 방’이었다.

뒤로 척 젖혀지는 3개의 의자가 놓여있던 이발소에 들어서면 언제나 향긋한 비누냄새와 두어 개의 신문, 그리고 그때만 해도 흔치 않았던 광석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가 흥겨웠다.

파란색과 빨간색이 동시에 세로로 돌아가는 이발소 표지판도 신기했지만 의사처럼 하얀색 가운을 입은 이발사들이 들이밀어 까까머리를 만들 때 사용하는 이발기계 바리깡도 이에 못지 않았다.

프랑스의 유명한 이발기계 제조회사인 바리깡에마르(Bariquand et Marre)의 일본식 발음이 그대로 전용된 바리깡이라는 기계가 대여섯번 머리를 왔다갔다하면 귀를 뒤덮던 더벅머리는 금새 사라졌다.

나는 어릴 적 머리를 깍을 일이 없어도 자주 이발소에 놀러갔다. 물론 이발소 앞집에 있던 구멍가게와 탁주집에 부모님 심부름 차 가던 길에 들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발소에서 얻어 들을 수 있는 세상이야기도 귀가 솔깃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시골의 일반 가정에서 신문을 보는 경우가 거의 없어 이발소는 자연히 신문을 볼 수 있는 도서관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었다. 매일 동네 사람들을 접하는 게 일상사였던 이발사는 자연스레 인근 지역에서 일어난 사소한 소식을 모았다가 다시 전파하는 소식통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요즘 표현을 빌면 지역사회의 정보 메신저였던 셈이다.

따라서 내 어린 눈으로 보면 동네에서 가장 유식한 사람은 당연히 이발사였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모 농림학교를 나왔다는 그 이발사는 품행도 단정하고 친절한데다 아는 게 많아 동네 대서방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최근에 고졸의 40대 이발사가 KBS 1TV의 퀴즈 프로그램 ‘퀴즈! 대한민국’에 이어 같은 방송의 ‘우리말 겨루기’에서도 우승, 퀴즈 2관왕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불현듯 어릴 적 고향마을의 이발소풍경이 떠올랐다. 그리고 속으로 ‘진정한 동네 이발사라면 만물박사일 것’이라는 생각도 이어졌다.

하지만 실제로 이번에 2관왕에 오른 찜질방 이발사 장래형(49)씨는 내 어릴적 추억속의 이발사와는 그 격이 완전히 달랐다. 시골마을의 두루춘풍식 식자가 아니라 변호사, 교수 등 내로라하는 재재다사들을 모두 거꾸러뜨린 퀴즈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의 인생 스토리도 한편의 드라마나 다름없었다.

가난한 집안 살림과 부친의 강권에 따라 할 수 없이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한 장씨는 고교 졸업 후 10여년 간 호텔, 가스회사 등을 전전하다 아내의 도움으로 서른 살이 넘어서야 이발사의 꿈을 이뤘다.

충남 천안의 한 찜질방에서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40만원 짜리 이발소를 운영하면서 다소나마 생활의 안정은 찾았지만 배움에의 한은 여전했다. 장씨는 2006년 방송대 중문과에 재학 중인 아내에게 경제·철학 용어의 뜻을 넘겨짚었다가 옅은 지식이라는 비야냥이 섞인 ‘습자지’라고 놀림을 받았다.

이에 오기가 생겨 “내가 퀴즈대회에 입상하면 다시 보겠지”라고 생각하고 7시부터 오후9시 사이의 근무시간 틈틈이 신문과 책을 보며 배운 지식을 노트에 정리해갔다. 요점과 급소에 대한 준비지식이 없던 그가 택한 방법은 ‘막고품기식’ 공부였다. 무조건 모르는 내용은 대학노트에 필기를 하며 준비했던 것이다.

이를 토대로 1년여를 준비한 장씨는 마침내 2007년10월 퀴즈왕에 등극, 상금 3000만원을 받았다. 퀴즈왕에 오른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2차도전인 우리말겨루기에 나섰다.

이번에도 특유의 노트정리를 꾸준히 시행했다. 국어사전 가운데 모르는 우리말로 채운 그의 노트는 63권에 달했다. 그는 마침내 이번에 ‘우리말 겨루기’ 에서 9개의 관문을 모두 통과해 19대 우리말 달인이 됐고 우승상금으로 3300만원을 받았다.

장씨의 쾌거는 학벌위조까지 성행하는 학력만능사회에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성실하게 노려하면 불가능은 없다는 사소한 진리를 보여준 것이다. 천안의 지역민들에게 자신의 상식과 도전정신을 나눠주며 즐겁게 살아가는 그가 마지막 꿈인 이발사 ‘명인’의 고지에도 오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