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나의 입장을 고백하고 말을 꺼내는 게 맞겠다. 필자는 박정희 정권을 매우 혐오하는 사람이다. 아마도 대학생활을 상상하기도 끔찍한 유신체제시절에 보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걸핏하면 긴급조치란 미명아래 사소한 집회나 축제마저도 철저하게 제재하고 인신구속을 여반장으로 여기던 시절이었으니 197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에게 박정희 정권이란 단어는 곧 유신군사독재와 동의어로 각인돼 있다.
하지만 나는 박 정권의 정책 가운데 단 두 가지만은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다름 아닌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정책과 고교평준화 정책이다.
그린벨트제도는 박 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1971년 처음 도입됐다. 당시 박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도시계획법을 제정, 대도시 주변에 말뚝을 박고 아예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그의 불도저식 그린벨트 고수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그나마 도시주변에서 푸른 녹지를 향유하고 있다. 물론 최근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그린벨트가 야금야금 훼손되기 시작, 사실상 유명무실화하기 직전이지만 말이다.
고교평준화 정책은 역시 박 대통령의 획기적 결단으로 1974년 도입됐다. 암기식·주입식 입시 위주 교육 폐단 개선과 고교 간 학력차 축소 및 대도시에 집중된 일류 고등학교 현상의 폐단 해소 등이 도입 취지였다. 일부의 반발도 있었으나 워낙 대통령 위세의 서슬이 퍼럴 때여서 이 제도는 곧 정착됐다. 평준화제도는 망국적인 입시과외열풍을 가라앉히는 등의 많은 순기능을 했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큰 사회적 의미는 한국사회를 독과점한 일류고 카르텔을 무너뜨리는 시발점이 됐다는 점이다. 현재까지도 그렇지만 과거 한국사회의 파워엘리트는 서울의 5대 공립명문고와 각 지방의 대표적 명문고 출신의 연합동창회나 다름없다. 그런데 평준화제도가 도입된 지 25년이 지나자 이제 일류고 카르텔이 급속히 붕괴돼가고 있다.
붕괴현상은 특히 관계(官界)에서 두드러진다. 행정부처에서 평준화 마지막 세대인 1976년고교 졸업생들이 이제 막 퇴역하기 시작하고 있다. 76학번 대학생이 4학년 재학 중인 1979년에 행정고시에 합격했을 경우 행시23회인데 현재 23회는 관가에서 대개 차관급 직위에 있다. 이는 예를 들면 평준화 이전의 경기고 출신중에서 고시에 합격한 관리들은 이르면 2~3년 내에 공무원 옷을 벗게 된다는 의미다. 조만간 행정부처를 비롯한 재계, 언론계 등 파워집단에서 일류고출신이 일거에 퇴장할 것이다.
그런데 이후 등장한 외국어고 등 특목고가 어느덧 과거 일류고의 자리를 대체해가고 있다. 권영길 의원의 분석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입학생 가운데 외고 출신이 입학정원의 7.65%, 23.63%, 22.68%를 차지했다. 특히 대원외고의 위세는 과거 경기고를 능가한다. 현재 생존해 있는 국내법조인 17,000여 명 가운데 대원외고 출신이 경기고에 이어 둘째로 많다.
특정 명문고 출신이 사회와 집단을 독과점하는 사회는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특히나 한국처럼 패거리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나라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대부분의 부처에서 핵심보직은 아직까지도 명문고출신이 독차지하고 있다. 과거 한 번의 고교입시 실패로 비명문고 출신들이 '천형'처럼 곱씹어야했던 좌절과 울분의 한이 다시 되풀이되게 해선 안 된다. 사교육비 절감이네, 외국어 전문가 양성이라는 본연의 목적에서 일탈했네 하는 부작용과는 또 다른 차원의 새로운 명문고부활로 인한 이 같은 폐해는 건전한 사회통합을 위해서도 시급히 방지해야한다.
이제 외고는 더 이상 존치할 경우 과거 명문고를 훨씬 능가하는 새로운 공룡이 돼갈 것이다. 하여 거듭 강조한다. 이 정부가 박정희 정권의 뒤를 잇는 산업화 보수세력의 적자임을 자부한다면 박 대통령이 평준화를 시행했듯 외고는 하루빨리 폐지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