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인신문 | 권성동 의원이 수감되었다는 소식에 당사자는 억울함을 토로할지 모르나, 이를 자업자득이라 여기며 통쾌해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의 수감은 어떤 면에서 그가 보여준 ‘의리’의 결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가 주군으로 모시던 윤석열 전 대통령이 먼저 옥고를 치르고 있으니, 그의 오른팔을 자처하던 이가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어쩌면 그들 세계의 논리일지 모른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은 익숙하지만, ‘친구 따라 감옥 간다’는 말은 실로 생소하다. 검사들이 흔히 쓰는 ‘피의자(被疑者)’라는 말이 있다. 범죄 혐의로 의심받아 수사의 대상이 된 사람이란 뜻이다. 평생을 권력의 정점에서 남을 단죄해왔을 그들에게 피의자라는 신분은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을 것이다. 어제의 준엄했던 칼날이 오늘의 자신을 겨누는 형국이니, 역사의 심판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업보(業報)는 피해 갈 수 없었던 모양인지, 결국 두 사람 모두 나란히 감옥행 열차에 오르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의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실로 ‘창대’했다. 한밤중에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격이었다. 고교 선후배 몇몇이 모여 꾸민 어설픈 시나리오는 참으로 가관이었다. 그 미약했던 시작이 결국엔 온 나라를 뒤흔드는 창대한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권성동 의원이나 윤석열 전 대통령이나,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왕’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권 의원은 수십 년간 강릉 땅의 맹주를 넘어 왕처럼 군림했다 하니, 그런 그에게 천하가 손바닥만 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한때 김문수 전 장관이 대권에 도전하며 분주할 때, 그는 “그 알량한 대통령 후보” 운운하며 공개적으로 폄훼했다. 대통령직마저 하찮게 여기는 듯한 발언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망각한 오만함의 극치였다.
이보다 먼저 왕이 된 이는 단연 윤석열 전 대통령이다. 대선 출마의 첫 행보가 손바닥에 ‘왕(王)’ 자를 쓴 것이었고, 두 번째는 TV 토론에서 그 글자를 만천하에 보여준 일이었다. 많은 국민이 그 모습을 보고 조롱과 감탄이 섞인 쓴웃음을 지었다. ‘손바닥에 왕 자를 쓴다고 왕이 될까’ 비아냥대면서도, 결국 그에게 표를 주어 권력을 허락했다.
그러나 재임 2년 11개월 동안 ‘바이든-날리면’ 발언부터 ‘VIP 격노설’, 전날 밤의 폭음으로 다음 날 경호까지 갖춘 빈 차를 출근시키는 듯한 기행(奇行)에 이르기까지, 국민은 TV 속 ‘기인 열전’을 보는 듯한 착잡함을 느껴야 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러한 행태는 스스로를 돌아볼 성찰(省察)의 자세는 없고 오직 남을 탓하는 교만(驕慢)만이 가득한 권력자의 모습을 비추었다.
물론 그들의 오만함은 자신들의 세계에서는 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민심(民心)은 곧 천심(天心) 이다.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국민 무서운 줄 모르고 함부로 날뛰는 자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위험하다는 방증이다. 군주가 길을 잃으면 백성이 길 위에서 헤매고, 위정자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면 나라는 도탄에 빠지는 법이다. 역량이 부족한 자가 권력을 쥐고 분수 밖의 이상을 꿈꿀 때, 그 고통은 온전히 국민의 몫이었다.
천박한 인물일수록 권력을 잡으면 ‘갑질’로 자신을 증명하려 든다. 그들은 이미 비굴한 삶이 주는 짜릿한 보상을 맛보았기에,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과거로 회귀할 것이다. 국민을 향해 총칼을 겨누는 비극의 역사는 과거의 인물들로 끝났어야 했다. 부디 잊지 말아야 한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 이라, 하늘의 그물은 넓고 성긴 듯하나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는 옛 성현의 말을 뼈에 새겨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