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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수백년 살아 온 544가구 삶의 터전… 수많은 사연도 지워진다

[현장 르포] 반도체 산단 지역의 사라지는 마을…②이동읍 화산리, 시미리, 덕성리

 

 

 

조선시대에 요업 번성하던 지역… 가마터 유적 여럿 남아
‘옹기가마’ 플라스틱에 밀리고 이번엔 산단조성에 또 밀려
아름아름 자리잡은 중소기업 89곳 근로자 수천명도 대이동
모산마을 구렁 고개 위 수령 350여년 된 느티나무 자리잡아
효자가 시묘살이 한 데서 유래한 시미리 모두 산단에 포함

 

 

 

용인신문 | 논과 밭, 푸른 산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던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과 남사읍 일대가 거대한 변화의 기로에 섰다. 무려 600조 원이 투입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첨단 반도체 클러스터 국가산업단지가 이곳에 조성될 계획이기 때문이다. 이는 용인시 역사상 가장 큰 발전 기회로, 미래 첨단 산업의 심장부로 거듭날 ‘화룡점정’이 될 것이다. 사라지게 될 마을 남사읍 지역(창3리 꽃골·1456호 6면)에 이어 이동읍(화산리, 시미리, 덕성리) 지역을 살펴본다.(편집자 주)

 

정부는 지난 2023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시미리·화산리·덕성리, 남사읍 창리 일원에 710만㎡ 규모의 ‘첨단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2024년 12월 국토교통부의 최종 승인을 거쳐, 710만㎡ 규모의 ‘첨단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 국가산업단지(이하 국가산단) 조성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이 사업은 용인시 1년 예산의 100배 이상을 투자하여 삼성전자의 반도체 생산라인 6기와 150여 개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설계 기업을 유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에 이주 산단 부지를 합하면 국가산단 규모는 778만㎡(약 235만 평)이다. 남사읍 창리 일원에 이주자택지 약 37만㎡(11만 평) 규모와 남사읍 완장리와 창리 일원에 기업이전단지 약 50만㎡(15만 평) 규모다.

 

이와 별도로 지난 2023년에는 국가산단 배후도시 역할을 할 이동읍 덕성1와 천4리 지역이 포함되는 69만 평(신미주아파트 제외), 1만 6000여 가구 규모의 이동공공주택지구 조성 계획을 발표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예상된다.

 

이 거대한 개발의 물결은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마을 공동체와 그 역사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이동읍 지역의 변화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동읍의 경우는 화산리, 시미리, 덕성리(덕성 테크노벨리는 국가산단 제외)에 널리 분포하면서 현재 지역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공장과 과거로부터 근현대 산업의 역사까지 사라질 운명에 놓였다. 또 544가구는 머지않아 대규모 이주를 시작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니다. 수많은 삶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공동체가 해체되고,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역사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 과거로부터 근현대 산업 역사를 간직한 이동읍

이동읍 지역은 조선시대에 요업(窯業:가마를 이용하여 찰흙 따위를 구워 가공하는 공업)이 번성하던 지역이다. 국가산단에 포함되는 화산리, 시미리에도 조선시대 가마터 유적이 여럿 산포해 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용인에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가 놓이면서 서울과 교통이 편리해지자 고속도로와 인접한 지역에는 각종 제조 공장과 창고, 연수원 등 서비스 시설이 들어오면서 빠르게 산업화와 도시화로 나가게 됐다. 이동면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송전천이 한강 수계가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환경 규제가 심하지 않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 중소업체를 중심으로 사업장이 많이 입주했다.

 

이주가 불가피한 업체는 89개이며 이곳에서 일하는 상근 종사자는 수 천여 명에 이른다.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 안에는 수십 년간 쌓아온 기업의 역사와 문화, 직원들의 땀과 애환, 그리고 지역사회와의 교류가 담겨 있다. 이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사실은 큰 아쉬움을 남긴다.

 

 

 

 

# 기억에서조차 사라지는 요업의 흔적

지난 4일, 이동읍 국가산단 지역을 찾았다. 안내를 해준 정인호(73·독립운동가 정현숙 지사 후손) 전 이동농협 상임이사(이하 정 상임이사)는 화산리부터 시미리, 덕성리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설명했다. 현재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전혀 알 수 없던 무수한 옛 이야기들이 정 상임이사를 통해 술술 쏟아져나왔다.

 

우선 화산리의 국가산단 포함 지역은 화산1리 일부와 화산2리 일부이다. 화산 1리는 요산마을, 화산 2리는 모산마을, 혹은 보리미라고 불리고 있다.

 

요산마을 표지석으로부터 화산CC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옆으로 삼봉산과 시궁산 골짜기에서 발원한 개울물이 흐르고 있다.

 

“개울을 끼고 국가산단 편입 여부가 갈려요. 개울을 기준으로 개울 안쪽에 있는 화산1리 일부 지역이 편입되고 나머지 화산1리는 국가산단에서 제외가 돼요. 또 송전리 방향으로 나가는 도로 옆 화산천을 중심으로 우측 화산2리 지역이 들어가게 됩니다. 화산 2리도 일부가 들어가는 것이죠.”

 

정 상임이사는 요산마을 표지석 근처에 있는 우측 2개 동의 공장이 대형 옹기가마터가 있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곳에는 예전에 질그릇을 굽던 대형 옹기가마터가 있었어요. 70년대까지는 운영을 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박해를 피해 천주교인들이 숨어 살면서 독을 굽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대규모 옹기가마였죠.”

 

정 상임이사는 5, 6세 때인 1950년대에 이곳 가마에서 동네 아이들과 놀았다고 했다.

 

“당시 흙벽돌로 허름하게 지은 옹기공장들이 여기 마당에 있었어요. 공장에서 물레를 돌려 그릇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가마가 뻗은 산 왼쪽으로는 기숙사가 있었어요. 방 하나 부엌 하나 있는 아주 허술한 흙벽돌집이 10여 채 있었어요. 그곳에 상주하면서 옹기를 구웠어요.”

 

이곳에서 생산된 항아리, 뚝배기, 시루, 굴뚝, 약탕기 등 옹기 제품들이 마당에 장작더미와 함께 쌓여있었다고 증언했다.

 

“옹기그릇을 동네 사람들이 사다가 썼어요. 그리고 구운 그릇들은 부인들은 리어커에 싣고 나가서 팔러 다녔어요. 오산 같은 곳에는 돈 있는 사람들이 대리점을 내서 팔기도 했어요.”

 

정 상임이사는 옹기가마가 1970년대에도 있었지만 플라스틱이 등장하면서 사양화 길을 걸으며 문을 닫았다고 기억했다. 화산1리 마을에 살던 옹기가마 사장 2인은 모두 작고했고, 옹기를 굽던 사람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 마을에 남은 사람은 없다.

 

정 상임이사는 “두 분은 동업은 아니고 먼저 하신 분이 천주교신자였어요. 초계정씨 분이 나중에 인수했는데 두 분 다 지금은 작고하셨죠”라며 사장을 했던 한 분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 집에는 지금도 옹기로 만든 굴뚝이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 멋스럽게 남아있다.

 

정 상임이사는 근처에 있는 자신의 대고모할머니인 정현숙 지사의 생가(화산1리)로 안내했다. 장독대에는 옹기가마에서 구웠던 항아리며 시루, 약탕기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옹기 굴뚝은 위쪽이 부서져 없어지고 아랫 부분만 일부 남아있다.

 

사실 이곳 옹기가마터는 고려~조선 시대의 것으로 조사됐다. 삼봉산 가지 능선 말단에 위치한 이곳 옹기가마터는 경기지역의 전통적인 옹기를 제작하던 유적으로 일부 훼손됐지만 마지막 요업 작업 후 최소한의 보호조치와 함께 현재는 수풀에 덮여있다.

 

근현대까지 도공들의 애환이 서려 있던 가마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 과거엔 거대한 양계 사업의 중심지

정 상임이사는 송전 방향으로 나가면서 화산2리 쪽을 안내 했다. 화산2리는 모산마을로 속칭 보리미라고도 한다.

 

도로를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화산저수지에서 발원한 화산천이 흐르고, 오른편으로는 공장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화산천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위치한 화산2리 지역만 국가산단에 포함된다. 정 상임이사는 현재 공장이 들어선 곳에는 외지인 3명이 운영하던 양계장이 꽉 들어차 있었고 돼지 축사도 섞여 있었다고 설명했다. 알을 낳는 산란계 수백만 마리가 이곳에서 길러졌고 돼지도 길렀지만, 돼지는 많지 않았다고 했다.

 

정 상임이사는 1979년 경 농협에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할 때, 양계장 앞을 지나면 파리가 등에 붙어 집에 도착할 때까지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동네가 지저분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닭똥은 거름으로 판매되어 화산천은 오염되지 않고 맑게 흘렀다고 했다. 정 전무는 동네가 변두리에 있다 보니 양계장, 돼지우리 등 지저분한 시설이 마구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달걀을 사 먹기 어려울 만큼 가난했지만, 양계장 사장들은 서울에 살고 있던 부유한 외지인들이었다. 이곳에서 생산된 달걀은 대량으로 외지로 실려 나갔다. 양계장들은 90년대 초까지 운영되다가 땅을 팔고 사라졌다.

 

모산마을의 구렁 고개 위에는 수령 350여 년 된 느티나무 보호수가 마을의 안녕을 지키고 있다. 주변의 밭에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토기, 자기편 등이 발견됐다.

 

화산 2리가 끝나가는 지점은 과거 예지농원으로 불리던 묘목장터로 이곳 구릉지 일대에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토기, 자기편 등이 분포한 유물산포지가 있다. 화산리에는 ‘사기점골’, ‘가마독골’ 같은 지명이 남아있어 과거 요업의 흔적을 짐작하게 한다. 구렁마을 느티나무 고개에서 시미리로 넘어가는 골짜기에도 시미리 ‘독정이골’이 있다.

 

 

#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

시미리는 세떼배기, 쌍괴정, 비룡동, 시미곡 등 여러 마을을 합쳐 불리는 이름이다. ‘시미리’라는 이름은 한 효자가 시묘살이를 한 데서 유래했다. 시미리는 전체가 3개 리로 이뤄져 있으며 3개 리 모두 국가산단에 포함돼 사라지게 된다.

 

시미1리인 쌍괴정 마을에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시미2리 비룡산 자락의 비룡마을은 일제 강점기 때 ‘미룡마을’로 불리다가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비룡’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곳. 이곳에는 과거 야유회, 단합대회 장소로 각광받던 ‘동인농장’과 유치원 교사들에게 몬테소리 교육법을 가르쳤던 ‘성모성심수녀회 시미분원’이 있다.

 

시미1리의 또 다른 중요한 장소는 1999년에 자광 스님이 창건한 ‘반야선원’이다. 이곳은 군종특별교구 교구장, 용인불교사암연합회 회장, 동국대학교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조계종 원로의장인 자광 스님의 30년 포교 활동의 중심지였다. 이 모든 시설들이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시미1리와 경계인 덕성 3리 금현마을(쇠재)은 용인향토문화유산 제49호인 애국지사 이한응 열사의 생가와 묘소가 있던 곳이다. 덕성3리 전체 지역이 이번 국가산단에 포함됐지만, 묘소는 이미 덕성2리에 있는 덕성테크노벨리 안쪽으로 이장, 국가산단 사업 범위에서 수백 미터 떨어져 있어 직접적인 영향은 없다. 덕성리의 경우는 3리가 국가산단에 포함됐으며, 덕성1리의 경우도 배후도시에 들어갔다. 덕성2리와 4리는 국가산단에서 제외됐다.

 

# 역사 속으로 사라질 개발의 빛과 그림자

용인 첨단 반도체 클러스터 국가산단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이끌어갈 중요한 프로젝트다. 하지만 이 눈부신 발전의 이면에는 조용히 사라져 가는 마을과 그들의 이야기가 있다. 경제적 번영이라는 빛 아래 가려진, 사람들의 삶과 역사의 소멸이라는 그림자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동시에, 과거의 소중한 흔적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보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