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의 귀
김수복
겨울나무와 봄나무 사이
새들과 허공 사이
아침과 저녁 사이
심장에 말뚝 박는 소리 화창하게 듣는다
약력: 1953년 경남 함양 출생. 1975년 《한국문학》신인상 등단.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 한국가톨릭문인회 이사장. 제18대 단국대학교 총장. 현 한국시인협회회장.
나사의 귀
김수복
겨울나무와 봄나무 사이
새들과 허공 사이
아침과 저녁 사이
심장에 말뚝 박는 소리 화창하게 듣는다
약력: 1953년 경남 함양 출생. 1975년 《한국문학》신인상 등단.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 한국가톨릭문인회 이사장. 제18대 단국대학교 총장. 현 한국시인협회회장.
절개지에서 이원오 고층아파트군群을 보면 뼈대가 궁금하다 물과 시멘트의 중량비를 따진다면 진부한 일 저들도 땅이나 산에서 무던히 웅크리고 있을 숙명이었을 것이다 영장류가 불러내어 거대한 도시의 파수꾼으로 세우고 그들이 지켜야 할 곳에 시멘트가 영토를 넓히고 있다 한때 이 땅의 주인공이었을 그들 절개된 곳은 짐승의 마지막 울음처럼 가빠진다 뼈와 뼈를 이어주며 상처가 되어 버린 곳 창신동 길을 걷다보면 언덕이 절규하는 곳마다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몽실거린다 축대라는 이름으로 붙어있는 하늘을 이고 사는 사람들 위태로움을 일상화하는 것은 꼬박 밥을 챙겨먹는 것과 같다 끊어지게 마련인 퇴락한 왕조의 계보처럼 후미진 산비탈 쓸쓸한 절개지 중력의 힘으로만 버티는 그들의 결기가 있던 한때를 생각한다 몸의 한 근을 베어가는 노년의 절개지에도 꽃은 핀다 이원오 2014년 <시와소금> 신인상 등단 2018년 시집 <시간의 유배> 출간 현재 한국역리학회 부이사장
굽은 세상에 바치는 노래 강민숙 내 팔은 굽었다 이제는 펼 수 없게 굽어버렸다 굽은 팔을 내려다보며 내가 바라보는 세상 그도 나를 닯았는지 굽어 있다 나는 내 이 굽은 팔을 펴지 못한다 해도 세상의 모든 굽은 팔을 펼 수만 있다면 달려가리라 펄펄 끓는 저 용광로 속일지라도 내, 달려가 뛰어들리라 가만히 돌아다보면 왼팔도 굽었고 오른팔도 굽어버린 이 세상 왼팔은 오른팔을 보고 비웃고 오른팔은 왼팔을 보고 병신이라 비웃는 이 허망하고 허탈한 세상 내 희망의 씨앗을 뿌리리라 땅이 씨앗을 품듯이 다 뜰어안고 지천으로 피는 꽃, 휘날리는 꽃향기 내가 피워내리라 내 조국 이 땅 위에다. *강민숙 시인의 시집 <소년공 재명이가 부르는 노래>에서 강민숙 시인 전북 부안 출생. 1992년 등단, 아동문학상 허난설헌문학상, 매월당문학상, 서울문학상 수상. 시집 「노을 속에 당신을 묻고」 10여 권이 있음.
애인을 씹다 최은진 식물성의 당신과 육식성의 내가 연애를 하기로 한다 사슴을 사냥해서 사자가 먼저 먹는 부위는 위(胃) 그것은 오랜 공복에 대한 위로겠으나 네 개나 되는 위(胃)를 차례차례 정성껏 씹어 먹으며 사슴이 했던 반추시간을 되짚어 가늠해 보려는 건지도 되새김질의 자세로만 삶을 유지해 온 사슴에게도 인내의 끝에 맞이한 한 끼 식사로 사슴의 내장을 씹고 있는 사자에게도 먹고 사는 문제가 곧 죽고 사는 문제였으니 남의 살이 이토록 맛있게 느껴지는 게 내 모든 비극의 시작 여름이 몸집을 불려가는 동안 허공에서 드라이에이징되는 심장 두 개 당신의 채식에 나의 육식이 곁들여질 때마다 맹수의 날 선 이빨같은 죄책감이 문득문득 나의 살을 파고들었고 당신과 내가 이렇게 다르다는 걸 먹고 사는 문제가 되새겨줄 때 우리 연애는 끝난다 잘 먹고 잘 살라는, 처절한 마지막 인사 공복을 살찌우는 밤 한때 애인이었던 당신을 여물씹듯 되새김질한다 최은진 경주 출생. 2019년 <서정시학> 등단. 용인문학회 편집위원.
별 신경림(1935년~2024)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 하늘에 별이 보이니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 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 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 약력: 충북 충주군(현 충주시) 출생. 1956년 등단.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역임.
신분당선 휘민 급행열차를 탄다 기관사가 없어도 문이 열리고 닫힌다 맨 앞칸으로 가면 어둠 속을 질주하는 불빛을 볼 수 있다 내시경 카메라가 식도를 훑고 지나가는 것 같다 객실 안은 마스크 쓴 사람들로 가득하다 새로운 풍경이다 어떤 단어에 신이 붙는 것은 새롭다는 뜻일까 다르다는 뜻일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 좋게 몇 개의 역을 지나쳤지만 미래는 가까워지지 않는다 내가 비건이 되면 세상에 단 두 마리뿐인 북부흰코뿔소가 멸종하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늦게 도착하는 사람 걱정하는 마음이 생기고 나면 이미 그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누군가 기침을 한다 마스크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본다 이 장면에도 신이 존재할까 신동탄까지 내려갔지만 그곳은 동탄이 아니었다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환승역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마스크는 불안의 안쪽일까 바깥쪽일까 약력: 충북 청원 출생으로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생일 꽃바구니》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동시집 《기린을 만났어》, 동화집《할머니는 축구 선수》, 그림책 《라 벨라 치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