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種 박설희 쓸쓸함과 막막함 사이에서 오늘의 물결이 닿은 곳 짝짓기를 거부해 후손을 남기지 않았다는 땅거북, 외로운 조지 마지막 종種으로 남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우주탐사선 파이어니어 10호는 우리 외에 지각 있는 존재를 만나지 못했다, 우리는 외롭다 등의 메시지를 담은 금속판을 싣고 우주로 날아갔다 ‘외롭다’는 마음을 우주인은 이해할까 검은 우주 속 단 하나의 종, 지구인 긴 밥주걱처럼 생긴 부리를 물속에서 휘젓는 멸종위기종 저어새도 도무지 먹이 활동에는 적합하지 않은 부리를 가진 나도 지구의 가장자리에 정박해 있는데 오늘도 난민처럼 지구 밖을, 별들을, 우주 너머를 기웃거리다 잠이 들 것이다 약력: 강원 속초에서 태어나 2003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 『꽃은 바퀴다』 『가을을 재다』, 산문집 『틈이 있기에 숨결이 나부낀다』 등이 있다.
듣는 사람 이시영 좋은 시인이란 어쩌면 듣는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야 깊은 산 삭풍에 가지 부러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놀라서 달음박질치는 다람쥐의 재재바른 발자국 소리도 조심조심 들을 수 있다 때론 벼락처럼 첨탐 높은 교회당을 때리는 야훼의 노한 음성도 어릴 적 볏짚 담 너머 키 작은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도 함께 들을 수 있다 좋은 시인이란 그러므로 귀가 쫑끗 솟은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야 잉크병 얼어붙은 겨울밤 곱은 손 불며 이 모든 소리를 백지 위에 철필로 꾹꾹 눌러쓸 것이다 약력: 전남 구례 출생하였고,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월간문학》 제3회 신인작품 공모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정지용 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지훈상, 백석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개망초꽃 안도현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 이곳 저곳 널린 밥풀 같은 꽃이라고 하지만 개망초꽃을 개망초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개망초꽃은 핀다 더러는 바람에 누우리라 햇빛 받아 줄기가 시들기도 하리라 그 모습을 늦여름 한때 눈물 지으며 바라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세상 한쪽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훗날 그 보잘것 없이 자잘하고 하얀 것이 어느 들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돋아난다 한들 누가 그것을 개망초꽃이라 부르겠는가. 약력: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등단.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외 다수.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는 15개국 언어로 해외에 번역 출간. 석정시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이수문학상, 윤동주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노크 김은령 물 위에 앉은 꽃 무연, 무연히 바라보는데 못 전체가 수런수런 일렁거렸다 깊은 곳에서 수면을 치는 어떤 파동이 있었다 스스로 환한 꽃, 꽃! 둥근 잎 아래 누군가 살고 있어 그가 물 위로 건져 올린 자명등이었던 것 하령지에 와서 수련 구경하다가 찰방찰방 맨발로 걸어 들어가서 부유하며 잠든 연자를 깨운 그 주인공을 불러보았다 한 세계를 보이시는 당신 거기 계세요? 김은령: 경북 고령 출생. 1998년 《불교문예》 등단. 시집 『통조림』, 『차경』, 『잠시 위탁했다』와 불교 장편소설 『일연, 달빛으로 머물다』 등이 있다.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약력: 만해 한용운(1879~1944)은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이자 평생 지조를 지킨 독립운동가, 승려, 저항시인이다. 1926년 한국 문학사의 불후의 명작인 시
탁본 수완 내가 네 안의 나를 볼 때 너는 내 안의 너를 본다 먹지로 탁본을 뜬 너와 나는 팔만대장경을 새긴 경판 전남 신안 출생, 1973년 출가 (해인사 등에서 정진) 1991년 『문학공간』 신인상 등단 현대불교문인협회 결성 계간 『불교문예』 및 『불교와 문학』 발행인 현대불교문학상 제정 및 운영위원장 (1996년~) 시집 『하늘 빈 마음』, 『이내의 끝자리』, 『향기는 아직 찻잔에 남았는데』, 『지리산에는 바다가 있다』, 『유마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