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중앙시장 이야기-38 김량장동 용인중앙시장(상인회장 이순환)은 용인의 대표적인 종합 도소매시장으로 1차식품과 의류, 생활용품, 음식점 등 다양한 업종으로 구성됐다. 특히 재래식 순대로 유명한 순대골목과 떡 골목은 단골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금학천변을 따라 열리는 용인민속 5일장은 백암 5일장과 더불어 용인을 대표하며 다양한 먹거리, 볼거리, 즐길거리를 제공한다. 중앙시장에 점포를 갖고 삶의 활기를 찾는 점포주들의 노하우와 경험담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 이순환 회장 시장상인회(회장 이순환) 연 락 : 031-336-1110 주 소 : 처인구 김량장동 137-1 위 치 : 제 2공영주차장 품 목 : 시장 활성화 정책 연구 60여년 역사를 지니고 지금도 용인은 물론 인근 도시에서 찾아오는 손님에게 재래시장이란 재미를 전하는 용인중앙시장에서 활성화 정책을 연구하며 머리를 맞대고 있습니다. 시장상인에게는 높은 소득을, 손님에게는 질 좋은 상품을, 여기에 재래시장만의 맛과 멋을 살리는 것이 상인회의 역할입니다. 10여년전 번영회를 상인회로 명명하면서 벌판이었던 노점상 형태에서 탈피, 본격적인 근대화시장으로 발돋움한 중앙시장은 아케이드를
▲ 안준섭 사진작가 많은 집과 건물들이 펼쳐져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 있다 또 그 사람들만큼 많은 마음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 내가 보는 이 곳에는 무수히 많은 마음과 사람과 집과 건물들이 있다 원래 나쁜 마음, 어쩔 수 없이 나쁜 마음 원래 선한 마음, 나쁘지만 목적있는 선한 마음 그런 수 없는 많은 마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며 나를 조종한다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생각하는 마음은 진정한 내 마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렇게 멀리서 보면 보이지도 않는 마음 그리고 보이지도 않는 사람인데 새해가 밝은지 벌써 열흘이 지났고 계속 춥다 이 세상 속에서 따뜻한 사람, 나로 인해 따뜻해지는 그런 한 해이고 싶다
▲ 김건웅 회장 따뜻한 세상/(사)용인사랑봉사대(회장 김건웅) 어르신 외로우시죠?저희가 달래드립니다. (사)자원봉사단 만남 용인지부 용인사랑봉사대(회장 김건웅)는 지난 25년여 전 처인구 포곡읍 마을회관을 다니며 어르신들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마음 맞는 지금의 회원들이 어울리면서 지역을 넓히게 됐고 양지, 신갈, 구갈까지 활동했으며 독거노인 말벗을 비롯해 방청소, 병원동행, 외출, 이미용 등 지역과 활동을 넓혔다. 현재 회원수는 500여명으로 늘었고 노인 복지뿐 아니라 지역의 모든 행사에 적극 참여하며 창단했던 현 유기복 부회장의 취지대로 봉사 단체로써의 면모를 갖췄다. 용인사랑봉사대는 봉사뿐 아니라 나라사랑 차원의 국민행사도 시작했다. 식목일에는 원삼면 좌항리의 31 운동 기념공원에 무궁화 240여 그루를 심었다. 유기복 부회장은 마침 유치원을 비롯한 초중고생이 가족과 함께 참여했다며 이들은 봉사자들과 함께 무궁화를 식재하며 국화의 소중함과 나라 사랑 체험이란 소중한 시간을 갖기도 했다고 말했다. 현충일에는 용인중앙공원에서 충혼의 불꽃은 겨레의 가슴에 영원한 승리의 빛이 되리라란 주제로 현충일 알리기 행사
▲ 만평
우농의 세설 밤의 대통령 김태촌의 명복을. 사람이 있는 곳에는 강호(江湖)가 있고, 강호가 있는 곳에는 이권 다툼이 있고 이권다툼이 있는 곳에는 주먹이 있다. 예의가 무너지고 정치판이 패권다툼으로 요동치고 종교가 사회를 정화시키지 못할 때면 등장하는 것이 그들이다. 목숨보다 의리와 주먹 하나로 국가의 법을 깡그리 무시했으며 금지된 일을 해냈다. 이긴 자가 왕이 되는 것이 그들의 불문율이다. 이를 일러 밤의 대통령이라 불렀다. 한비자는 오두라 하여 이를 싫어했지만 사마천은 그의 역사책에 의협이라는 이름으로 기록 한다. 그중 하나가 곽해(郭解)라는 협객이다. 곽해는 오척 단구로 물러설 줄을 모른다. 물러서지 않는 이가 또 있으니 북한 인민무력부장 오백룡이다. 구(舊) 소련 군사학교 훈련 때 뒤돌아가! 하면 군인은 뒤돌아가는 법이 없다며 앞으로만 갔다. 이로 인해 명령불복종으로 갖은 욕을 당했지만 패장이나 뒤돌아가는 법이라며 끝까지 버틴 사내다. 이 오백룡이가 젊은 시절에 시라소니 윗대의 주먹들과 어울렸다한다. 이른바 낭만파 주먹의 시작이다. 낭만파 주먹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하나 있다. 동네 깡패에서 살인자로 장군으로 신(神)의 반열에 오른 사내. 누상 촌
다시, 용인문학 순례길을 위한 제언 용인신문이 『용인문학』에 실렸던 용인문학 순례길을 가다 를 재정리해 게재했다.『용인문학』19~20호까지 소개했던 용인문학 순례길 1~4코스 중 3~4코스를 지난해에 이어 소개한 것이다. 다음의 내용은 필자가『용인문학』에 썼던 제언의 글 중 일부다. 용인문학회가 진행했던 용인문학 순례길 답사 중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최남선 묘역의 발견이었다. 한국 최초의 현대시로 평가되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쓰고, 3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했던 육당 최남선(1890.4.26~1957.10.10). 용인지역에서는 『용인문학』과 《용인신문》을 통해 처음 소개된 셈이다. 이 묘역에는 최남선이 민족대표로 기초한 「독립선언문」 전문이 새겨진 비(碑)와 둘째 아들 한웅(漢雄)이 짓고, 일중 김충현이 쓴 작은 추모비(1978년 12월 세움)가 세워져 있었다. 최남선이 잠들어 있는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일원의 천주교 서울대교구 용인공원묘원엔 최근까지도 김수환 추기경과 소설가 박완서가 안장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쓴 시인 김영랑(1903.1.16~1950. 9.29)을 비롯해 수필가이자 번역가인 전혜린(1934
따뜻한 세상/실버예술단(단장 배정임) 뒤늦게 배우고 익힌 재능을 기부에 우리는 60세 이상 75세까지 노익장을 자랑합니다. 늦었다는 생각을 버리고 열심히 배웠습니다. 무용, 사물놀이, 하모니카, 민요, 챠밍댄스 등... 배우고 익히다 보니 어딘가 유용한 곳을 찾게 됐고 요양원, 병원, 어르신 보호시설 등 우리는 발산할 수 있어서 고맙고 그곳 어르신들은 눈이 즐거울 수 있었습니다. 어느새 정기 행사로 발전했습니다. 처인구 동부동에 35년여를 거주하며 동부동 풍물동아리, 백암면주민자치센터 풍물반, 이동농협 풍물반, 천리 사회복지관 풍물단 등 풍물놀이 강사로 지도에 여념이 없는 실버예술단 배정임 단장은 배우고 난 학생들의 끼를 발산할 곳을 찾았다. 배 단장은 열심히 배운 수강생들이 배운 풍물놀이를 어딘가 발표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채워줘야 했다며 어느 정도 자신의 시간을 낼 수 있는 60세 이상 수강생을 대상으로 재능 기부 봉사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난 2010년, 풍물반을 수료한 60~75세까지의 뜻을 같이하는 지역 수료생 30명이 실버예술단을 창단했다. 배우는 것이 즐거웠던 이들 회원은 풍물 한 가지에 만족할 수 없어 하모니카, 노래, 무용, 댄
용인중앙시장 이야기-37 ▲ 권영우 대표 김량장동 용인중앙시장(상인회장 이순환)은 용인의 대표적인 종합 도소매시장으로 1차식품과 의류, 생활용품, 음식점 등 다양한 업종으로 구성됐다. 특히 재래식 순대로 유명한 순대골목과 떡 골목은 단골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금학천변을 따라 열리는 용인민속 5일장은 백암 5일장과 더불어 용인을 대표하며 다양한 먹거리, 볼거리, 즐길거리를 제공한다. 중앙시장에 점포를 갖고 삶의 활기를 찾는 점포주들의 노하우와 경험담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광주순대(대표 권영우) 연 락 : 031-321-7782 019-542-8989 주 소 : 처인구 김량장동 133-37(105호) 위 치 : 시장 순대골목중간 품 목 : 순대, 족발, 돼지국밥 마평동에서 7년, 전대리에서 2년 간 백암 가마솥 순대로 손님들과 친했습니다. 이곳에서는 1년 남짓이지만 지난날을 잊지 못한 당시 단골손님들이 하나 둘 찾아오면서 이제 옛 전성기를 회복하고 있습니다. 정갈한 식당관리와 깔끔한 음식 맛이 그분들을 다시 불렀나 봅니다. 어? 여기로 옮기셨나요?가 연결고리로 작용했습니다. 광주순대 권영우 대표는 음식업계 28년, 베테랑이다. 조리훈련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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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양민 대한민국에 여성대통령시대가 열렸다. 정말 여성대통령이 탄생했다. 청년시절을 여성정치운동의 현장에서 보낸 필자에게 이번 대선의 감회는 남다르다. 20년간 정치현장에 몸담은 필자가 지켜본 대한민국의 정치풍토는 여성이 정치인으로서 성공하기에는 어렵고 힘든 구조를 가졌고 어렵사리 정치권에 진입하더라도 숱한 좌절과 위기를 겪는다. 필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가진 직업이 여성단체의 활동가였다. 직장은 한국여성정치연구소로 1990년대 여성정치참여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였다. 30여 년 만에 지방자치제가 부활되어 1991년에 치룬 구시군의회의원 선거에서 여성의원의 비율은 0.9%에 불과했고 연이은 95년, 98년의 지방선거에도 여성비율은 3%에 미치지 못했다. 지금이야 여성들이 정치참여를 당연시하지만 90년대 만해도 참 유난스런 여자들의 별난 극성이라고 치부되기 십상이었다. 2000년 한나라당 사무처로 직장을 옮긴 후, 여성조직의 관리자로서 선거에 출마하려는 여성들을 만주독립운동하듯 도우면서 여성이 정치인으로 성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뼈저리게 절감하기도 했다. 지난 20년간 각계의 노력으로 총선 비례대표 50%할당, 지방선거 지역구여성할당 등 제도적